박천휴 작가, 윌 애런슨 작곡가, 배우 대런 크리스 등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제작진과 창작진들이 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78회 토니상 수상식에서 뮤지컬 작품상을 수상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1987년 서울의 거리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간절한 몸부림과 함성으로 들끓었다. 눈을 지독히도 후벼파는 매캐한 최루탄 연기 또한 가득했다. 갓 대학에 발을 디딘 소년은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시대의 격류 속에서 허우적댔다.
그런 그에게는 피난처가 있었다. 동숭동 대학로. 어느 가을 밤 대학로 한 귀퉁이의 '지하' 소극장에서는 작은 창작 뮤지컬이 공연됐다. 4명의 배우와 그보다 적은 3명의 관객은 함께 작품을 만들었고, 그 공감과 떨림은 인근 포장마차의 2차로까지 이어졌다. 배우 외에 막노동, 배달까지 하던 형과 누나들은 "언젠가 뉴욕의 무대에 서고 싶다"고 말하며 쑥스럽게 웃었다. 우리는 "브로드웨이"를 외치며 꿈을 위해 건배했다.
그렇게 잊혀져갔던 그들의 꿈은 30년 뒤 대학로의 또다른 '지하'에서 후배들에 의해 다시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2016년 겨울 한국산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이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에서 초연됐다.
그리고 이 작품은 10년 뒤 '공연계의 오스카'라 불리는 토니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6개 부문을 휩쓸었다. 국내 창작 뮤지컬의 토니상 작품상 수상은 처음있는 일이다. 영화의 아카데미상(기생충.2019), 방송의 에미상(오징어게임.2022)에 이어 한국 대중예술이 또다시 미국 시장의 정점에 선 것이다.
2021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 '올해의 아티스트상' 수상한 BTS. 연합뉴스<어쩌면 해피엔딩>이 초연되기 3년 전, 강 건너 논현동의 비좁은 지하 연습실에서는 소년 7명이 피, 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앞날은 지하처럼 깜깜했지만 꿈과 열정으로 이겨냈고, 소년들은 '지구 최고의 밴드' BTS(방탄소년단)가 됐다. 미국 4대 대중음악상인 빌보드, MTV VMAs, AMA(American Music Awards)를 석권하고 그래미 후보에도 올랐다. 그렇게 세계로 가는 K컬처의 길을 닦았다.
BTS와 <어쩌면 해피엔딩>은 여러 면에서 접점을 가진다. 이들은 대형 자본의 투입 없이 중소 회사가 한국적 토양에서 만들어낸 한국 대중예술의 빛나는 성취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또 아미(ARMY)라는 팬덤이 미국 라디오 DJ들에게 진심어린 편지를 보내 BTS의 노래를 알리고, 끝내 미국 TV무대에 데뷔시킨 것처럼 <어쩌면 해피엔딩>에게는 Fireflies(반딧불이)라는 헌신적인 팬들이 있다. 연습생, 칼군무 등의 이면에 쏟아지는 한국 대중예술에 대한 일견 타당해 보이는 비판이 있지만, 한국인의 창의력과 감성, 열정으로 지하에서 꽃 피워낸 한국 특유의 독창성에 세계인은 더 공명하고 매혹되는 듯하다.
2022년 제74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받은 황동혁 감독(오른쪽). 연합뉴스영화 <기생충>의 반지하방은 현재 사회의 부조리를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시각적 장치이다. 성공과 실패,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도전하다 엎어지고, 대들다 깨져온 우리 처지라고 할까.
하지만 한국 대중예술은 드디어 반지하의 문을 박차고 그렇게나 꿈 꿨던 더 큰 세계로 나왔다. 그러자 이제 많은 이들은 말한다. 'K컬처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과 투자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국내, 아니 전 세계의 팬들은 덧붙이고 싶어한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말아달라'고. K컬처의 성공을 정권의 트로피나 정부의 생색내기로 삼지 말아달라는 얘기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었던 높은 문화의 힘'.
한국 대중예술에 판만 잘 깔아주자. 그러면 알아서 잘 클 것이다. 팬의 한 사람으로서 굳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