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쌀의 정치학…日고이즈미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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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값 폭등으로 물가 불안, 집권 자민당 곤혹
고이즈미 장관의 강력한 쌀값 안정 정책 시행으로 반전
차기 리더 부상 등 하반기 선거 앞두고 日정계 판도 변화

지난 1일 도쿄의 일본 할인 소매업체 돈키호테 지점에서 한 고객이 정부가 재량 계약에 따라 비축해 놓은 쌀 자루 앞을 지나가고 있다. 연합뉴스지난 1일 도쿄의 일본 할인 소매업체 돈키호테 지점에서 한 고객이 정부가 재량 계약에 따라 비축해 놓은 쌀 자루 앞을 지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이제 못 가겠어"
 
지난달 일본을 다녀온 친구가 던진 말이다. 이유는 "비싸졌다"는 것이다.
 
100엔당 1000원을 넘었던 환율은 900원대 중반으로 안정됐지만, 물가가 비싸졌단다. 숙박비도 그렇지만 음식값이 많이 올랐다고 한다.
 
실제로 일본의 외식비는 올들어 4월까지 최대 16%나 올랐다. 일본의 유명 라멘 체인인 이치란(一蘭)은 4월 1일부터 기본 돈코츠 라멘 가격을 980엔에서 1080엔으로 인상했다. 이렇다 보니 2%대 중반이었던 일본의 소비자물가는 올해 3%대 중반으로 뛰었다. 
 
그 중심에는 쌀이 있다. 일본 쌀값은 올해 두 배나 폭등했다. 5월말 기준 5kg 백미 한 봉지는 평균 4260엔(4만265원.6월18일)으로 한국 쌀(2만원 선)보다 두 배가 비싸다. 이같은 가격 경쟁력으로 한국 쌀이 35년만에 일본에 수출되기 시작했다.
 
10일 일본 북동부 센다이의 센다이역에서 비축된 쌀이 신칸센 초고속 열차에 싣고 있다. 연합뉴스10일 일본 북동부 센다이의 센다이역에서 비축된 쌀이 신칸센 초고속 열차에 싣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의 쌀값 급등의 이유는 기후, 농정, 유통, 관광 등 복합적이다.
 
2023년 여름을 덮친 기록적인 폭염 등 이상기후는 쌀 수확량을 크게 감소시켰다. 여기에 지난해 난카이 대지진 경보 등에 따른 사재기 움직임 등이 공급을 더욱 압박했다. 특히 코로나 이후 외국인 관광객 급증은 쌀 부족을 더욱 부채질했다. 일본의 외국인 관광객은 지난해 3600만명을 넘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한국과 중국이 절반을 넘었다. 
 
일본 정부는 수요에 맞춰 쌀 재배를 줄이는 대신 보조금을 주는 쌀 감산(減反) 정책을 써왔는데, 외국인 관광객이라는 외생 변수가 더해지며 쌀값 폭등이 일어났다.
 
일본의 주식(主食)은 쌀이다. 생계를 이어간다는 말을 한국과 마찬가지로 '밥을 먹는다'(飯を食う)라고 표현할 정도로 쌀은 일본인의 삶 자체다. 그런 쌀 가격이 두 배나 오르자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지지율은 20.9%까지 추락했다.
 
이 와중에 쌀 정책을 담당하는 에토 다쿠 농림수산상의 "쌀을 사본 적이 없다. 지지자들이 많이 준다"는 저 세상 발언이 나왔다. 민심은 폭발했고 코 앞에 선거가 닥친 자민당에는 먹구름이 드리웠다.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농림수산상이 가나가와 현의 비축 쌀 창고를 점검하고 있다. 연합뉴스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농림수산상이 가나가와 현의 비축 쌀 창고를 점검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갑자기 게임 체인저가 등장했다. 후임 농림수산상인 고이즈미 신지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아들인 그는 취임하자마자 "비축미를 절반 가격인 2000엔(5kg)에 공급해 쌀값을 잡겠다"고 공언했다. 야당은 "비축미는 동물 사료로 쓰게 될 묵은 쌀이어서 맛이 없고, 시중에 유통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비웃었다. 향후 선거 승리를 위해 정부의 실패를 바라느냐는 질타도 있었지만, 국민과 언론 역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44세의 젊은 고이즈미 장관은 불과 1주일만에 비축미를 1700~2000엔에 약속대로 시중에 공급했고, 물량은 순식간에 동이 났다. 도매상 등이 낀 복잡한 경매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소매업체에 공급하는 유통구조 개혁이 비결이었다. 고이즈미 농림상은 이에 그치지 않고 한국, 미국 등으로부터 긴급 수입을 통해 쌀을 비롯한 다른 농산물 가격까지 안정시킬 태세다.
 
"정치적 허풍"으로 일축하던 야당의 발등에는 불이 떨어졌고, 고이즈미는 단숨에 차세대 정치 리더로 떠올랐다. 쌀값은 여전히 높은 상태지만 과감한 개혁과 강한 추진력, 신속한 실행을 통해 '민생을 위하는 행정형 개혁가'로서 이미지를 공고히 했다는 평가다.
 
덕분에 이시바 내각의 지지율은 최고 39%까지 20%p 가까이 치솟았다. 만약 오는 22일 도쿄도 의회 선거, 다음달 20일쯤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숭리할 경우 고이즈미는 강력한 차기 총리로 거론될 전망이다. 
 
일본의 쌀에서 보는 정치. 결국 민심을 얻는 것은 정략이 아니라 위민(爲民)의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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