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반발에 되돌아가는 안창호 국가인권위원장. 연합뉴스이른바 '윤석열 전 대통령 방어권 보장안' 의결로 본격화 된 내란 옹호 논란과 맞물려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면서 내외부의 위기에 직면한 모양새다.
안창호 인권위원장은 최근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을 찾았다가 시민단체들의 반발로 사실상 쫓겨났는데, 조직 내부에선 그간의 반인권적 행보의 결과라는 비판이 분출하고 있다. 인권위는 국내 시민단체의 문제 제기로 외부적으로는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GANHRI·간리)의 특별심사까지 앞두고 있는데, 20년 간 'A등급'으로 유지해 왔던 국제적 위상이 추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5·18기념식서 퇴장 당한 첫 인권위원장…"안타깝게 생각한다"
안 위원장은 지난 18일 오전 5·18민주화운동 제45주년 정부 기념식 참석을 위해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았으나 시민 단체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끝내 입장하지 못하고 약 10분 만에 돌아갔다. 인권위원장이 민주주의 기념식에서 사실상 퇴장 당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5·18 관련 단체와 광주 시민단체들은 기념식이 열리기 전부터 안 위원장의 참석을 거부한다는 입장을 잇따라 냈다. 사단법인 5·18서울기념사업회와 오월어머니집은 기념식 전날 밤 긴급 성명서를 내고 "인권위원장 안창호는 5·18기념식 '봉변 쇼' 기도를 당장 중지하라"며 "분노한 5·18 피해자들에게 욕을 먹고 봉변당하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연출해 자신을 극우 보수의 수난자처럼 행세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비판했다. 25개 단체로 구성된 광주시민단체협의회도 기념식 이틀 전 안 위원장을 겨냥해 "국민 인권 옹호는 없고 내란 수괴의 특권만 주장했다"며 참석 거부 의사를 강하게 표출했다.
인권위는 수장 퇴장 사태에 대해 당일 낮 12시 30분쯤 "오늘 추모식에 참여하려 했으나, 입장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인권위는 5·18 정신을 등불 삼아, 이 땅에 민주주의가 더욱 튼튼히 자리 잡고 모든 국민의 인권이 신장될 수 있도록 인권 보호에 앞장서겠다"는 짤막한 입장문을 냈다.
"내란 옹호에 대한 반성 없는 행보"…내·외부 비판
연합뉴스인권위 안팎에선 곧장 거센 비판이 터져나왔다. 19일 오전 인권위 내부 게시판에는 '5·18'이라는 제목으로 "고통 받는 신앙인의 모습 보여주고 싶어서였는지 몰라도, 위원장이 그러고 나면 그 오물과 수치는 직원들이 뒤집어쓴다. 그만 좀 했으면 한다"는 내용의 글이 게시됐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안 위원장이 인권위 인지도 향상에는 어마어마한 공로를 세우고 있다'는 취지의 자조적 평가 등도 오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인권위 남규선 전 상임위원은 이날 CBS노컷뉴스와 통화에서 "당사자들이 오는 것을 반대하는 상황인 만큼 (안 위원장이 기념식에)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놀랍게도 (기념식에) 갔는데, 그건 예의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남 전 위원은 19일 퇴임사에서 "안창호 인권위원장은 사퇴하십시오. 인권위원장은 윤석열 전 대통령 방어권 권고에 참여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독립성이 없는 인권위는 인권위가 아닙니다"라고 일갈했다.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명숙 활동가도 통화에서 안 위원장의 기념식 참석 시도를 두고 "불법적인 비상 계엄과 포고령에 대해 인권 침해라는 입장을 내는 게 아니라, 인권 침해한 윤석열을 옹호하는 의견을 내놓고 아무런 사과 없이 기념식에 간다는 건 반성이 없는 것"이라며 "주최 측에 대한 존중도 없다"고 비판했다.
인권위는 지난 2월 10일 제2차 전원위원회에서 '계엄 선포로 야기된 국가적 위기 극복 대책 권고의 건'을 안 위원장과 김용원 상임위원을 포함한 7명의 찬성과 남규선 전 위원 등 4명의 반대로 일부 수정해 가결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 방어권 보장안'이라고 불린 해당 안건의 최종 결정문에는 "비상계엄 선포는 고도의 통치행위"라는 판단과 함께 "이를 불법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담아 당시 윤 전 대통령 측 주장을 그대로 읊은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 특별심사 예정돼…"강등될 만한 행보"
인권위는 오는 10월에는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GANHRI·간리)의 특별심사를 앞두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 방어권 보장안 의결 주도에 이어 시민들이 반대하는 기념식 참석 강행까지, 안 위원장의 이 같은 행보가 A등급이라는 국제적 지위 유지 여부를 결정하는 심사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9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서미화 의원실이 입수한 '간리 승인소위 특별심사 답변서 초안'에 따르면, 인권위는 계엄령 선포에 어떤 대응을 했는지 묻는 질문에 '계엄선포로 야기된 국가적 위기 관련 인권침해 방지를 위해 윤석열 전 대통령 등에 대한 탄핵심판 사건 심리 시 적법절차 원칙을 준수할 필요가 있다는 등의 주문을 담은 권고 및 의견표명을 결정했다'고 적시했다. 계엄 선포와 관련된 인권 침해 문제의 인권위 대응 부분에 '윤석열 방어권 보장 안건' 통과를 답변으로 제시한 것이다.
인권위원회 바로세우기 공동행동에 참여하고 있는 국제민주연대 나현필 사무국장은 "안 위원장이 지속적으로 (간리) 특별심사에 악영향을 미치는 일들을 계속 벌이고 있다"며 "(기념식에) 가려는 과정들의 부적절성과 관련해서도 간리에 추가로 자료를 제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명숙 활동가는 이번 기념식 참석 강행이 "인권 옹호의 의지라기보다는 자신이 재직하는 동안 등급 하락은 막아야 한다는 정략적 사고"라며 간리 특별심사를 의식한 면피성 행보였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어 "한국 인권위는 동남아 국가보다 기구의 독립성이 강하고 기능이 많은 편이라 상대적인 평가로 강등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하는데 그간의 행보, 특히 계엄을 옹호한 사안 자체 만으로 보면 강등될 사안"이라고 짚었다.
인권위는 다음 달 1일까지 간리 승인소위 사무국에 답변서를 제출해야 한다. 특별심사 결과에 따라 A등급에서 B등급으로 강등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도 적지 않다. A등급은 유엔 인권이사회 등 국제무대에서 발언권을 부여 받는 등 독립성과 신뢰성이 인정된 기구에 주어지는데, 한국 인권위는 지난 2004년 A등급을 획득한 후부터 현재까지 A등급을 유지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