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총재와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 연합뉴스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자민당 총재가 오늘(21일) 일본 첫 여성 총리에 오른다. 며칠 전만 해도 공명당과 연립 정권이 깨지면서 13년 만에 정권을 넘겨줄 위기에 처했었는데 극적인 반전을 이뤘다. 야 3당의 연합 공세에 총리직이 불투명해졌지만 같은 강경 보수 노선의 일본유신회를 설득해 연정에 합의하면서 위기를 극복했다. 유신회에게 뒤통수를 맞은 입헌민주당과 국민민주당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됐다.
다카이치 총재가 유신회를 접촉해 연정 시도에 나선 지난 17일 일본의 제81대 총리가 세상을 떠났다.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향년 101세였다. 그는 전후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주변국 침략에 대한 "통절(痛切)한 반성"과 "진심의 사죄"를 명시해 발표한 '무라야마 담화'로 유명하다. 2년 앞선 고노(내각관방장관) 담화에 이어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식민 지배를 '침략'으로 규정하고 일본 정부 차원의 공식 사과를 했다. 이는 일본 민주당 정권(2009년 9월~2012년 12월)의 간 나오토 총리 담화로 계승되는 등 한일 과거사 문제의 모범적인 기준이 됐다.
다카이치 총재는 무라야마 총리와 대척점에 서 있는 강경 보수, 심지어 극우로도 평가되는 인물이다. 다카이치 총재는 31년 전 무라야마 전 총리와 국회에서 치열한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33세의 초선이던 다카이치 의원은 대정부질의에서 무라야마 전 총리에게 "무엇을 근거로 침략 행위라고 하느냐", "국민적 협의 없이, 명확한 근거도 없이 총리 멋대로 일본을 대표해 사과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날선 공격을 퍼부었다. 이에 무라야마 전 총리는 "일본 총리로서 일본을 대표해 매우 죄송하다는 반성의 마음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맞섰다.
다카이치 총재는 이후에도 "무라야마 담화를 수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2010년 언론 인터뷰에서는 "내가 총리가 된다면 담화를 무효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2019년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 당시에는 아베 담화 중 '자녀와 손자 세대까지 사죄를 시켜서는 안 된다'는 구절을 들며 "계승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과거사를 놓고 양극단에서 대립하던 두 정치인은 의외로 몇몇 유사점이 존재한다. 다카이치 총재 본인이 무라야마 전 총리의 별세 소식에 "현재 나 자신도 비슷한 입장"이라며 애도하기도 했다.
자신이 야당과의 연정을 통해 총리가 되는 것처럼 일본사회당 위원장이던 무라야마 전 총리도 자민당과 연정 수립 과정에서 70세의 나이로 총리직에 올랐다. 또 두 사람 모두 보기 드문 비(非)세습 고위 정치인이다. 다카이치 총재의 아버지는 평범한 회사원이었고, 무라야마 전 총리는 어부의 아들이다.
자민당은 중도보수 성향인 공명당과 결별하고, 더한 강경 보수인 일본유신회를 연립 정권의 파트너로 택했다. 한일 관계의 앞날이 우려되는 것은 당연하다. 총리가 되는 다카이치가 무라야마와 공통 분모에 역사관까지 추가할 수는 없을까? 일단 그는 최근 야스쿠니신사 가을 제사 때 직접 참배하지 않았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담화에서 '의지하는 데는 '신의'보다 더한 것이 없다'는 한자 성어를 인용하며 "신의를 시정(施政)의 근간으로 삼겠다"고 다짐했다. 다카이치 신임 총리의 '신의'를 기대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