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왕년의 자취-선셋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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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17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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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의의 가장자리 톡]

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
카페라고는 하지만 간판도 없다. 할인마트 유리창에 가로 60cm쯤 되는 네온사인 'sun set'이 걸려 있을 뿐이다.

'선셋 카페'는 인구 3천여 명이 산골짜기마다 흩어져 살아가는 외딴 면소재지에 자리잡고 있다. 이 카페를 지키고 있는 70대 초반의 노인은 과묵해 보인다. 그가 왕년의 모험을 풀어놓는다. 이야기의 주제는 일관되게 자기 영웅담이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개인의 역사가 분명한데 모두가 보인다.

철학이 있고 경제가 있고 역사 그리고 노동과 열정, 낭만이 있다. 그 모든 것이 가족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연결되는데, 그 고리마다 꿀 같은 달콤함과 생쑥 같은 씁쓸함이 향신료처럼 뿌려져 있다.

"서른세 살 때 겁도 없이 새마을금고를 만들었어요. 서민들에게 짜장면 사주며 대출해주는 금고를 만들자! 짜장면 얻어먹고 대출해주는 그런 나쁜 금고가 싫었거든. 그때 전국 새마을금고 가운데 내가 최연소 이사장이었어요. 아직도 그 기록이 깨지지 않았을걸! 그 금고 건물을 지은 것도 나예요. 내가 자격증만 스무 개가 넘거든. 토목, 건설, 조경, 포크레인, 다 내가 해요."

오후의 햇빛이 구름 사이로 비친다. 물건을 사러 왔던 손님이 돌아가면 다시 나에게로 다가와 왕년의 모험을 풀어놓는다.

"이 카페는 딸이 했는데, 일주일 전에 서울로 올라갔어요. 여기 올 때마다 봤잖아요? 우리 막내딸요. 선셋 카페 사장님. 서울 가서 연락도 없는 거 보니 일이 잘되는가 봐요. (웃음) 야무졌어요. 초등학교 때 혼자서 시내에 있는 바이올린 교습소를 다녀오는 아이였어요. 시내버스로 왕복 두 시간이나 걸리는데…… 그래서 사범대 음대를 나왔잖아요. 시내 S고등학교 음악 교사를 하다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애가 비썩 마르는 거예요. 에휴! 보다 못해 사표 내라고 했어요. 3년 만에 그만뒀어요.

딸에게 마트 입구에다가 커피숍을 차려줬어요. 그냥 취미로 해보라고…… 한 3년 잘했어요. 기특하지요? 그러다가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서 어느 날 훌쩍 서울로 갔어요. 멋진 사윗감이나 데려오면 좋겠네."

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
서쪽 하늘에 노을이 생긴다. 그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마트 입구 유리문에 기대 노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왕년에는 이 자리가 세상의 중심이었어요. 한 번도 황량한 변방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이웃들과 친구들, 일꾼들, 날아가듯 빨리 가는 시간과 태양과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침묵) 이제 모든 것이 느려졌고 잠잠해졌어요. 마트하고 선셋 카페를 지킬 사람도 나 하나뿐이에요. 그래도 딸 아이가 있을 때는 활기가 돌았어요."

말이 잠시 끊긴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슬쩍 마트 안을 둘러본다. 개 사료, 장화, 모기장, 우비, 우산, 크레용, 볼펜, 라면, 생수, 샴푸, 비누, 껌, 우유, 아이스크림, 밀짚모자, 낫, 호미, 빗자루……. 그때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눈물이 고이면서 반사된 빛이다. 그가 아닌 척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새벽 4시가 지나면 절로 눈이 떠져요. 그러면 집을 나와 면소재지를 한 바퀴 돌아요. 모험의 자취를 따라다니며 그 힘을 받는 거 같아요. 종일 혼자서 물건 팔고 커피 내리며 왕년의 나에게서 위로받는 건지도 몰라요.

왕년의 모험이란 것이 저금통장 같은 밑천이 될 줄 알았는데 오늘도 모험이네요. 아내는 고단한 질병과 싸우고 있고, 서울 간 딸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미로 같은 세상을 달려가고 있고. 나야 뭐, (잠시 침묵) 지금…… 이렇게…… 멈춰버린 것만 같은 시간과 싸우고 있고."

손님이 온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그가 어슴푸레한 선셋 주방으로 들어간다. 에스프레소 머신이 유리창을 넘어온 노을에 사금파리처럼 반짝인다. 형형색색의 잔들이 찬장 안에 다알리아꽃처럼 피어 있다. 그가 커피 머신 앞으로 다가가 고압으로 달궈진 에스프레소를 내린다.

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
"어제의 노을이나 일 년 전의 노을이나 모든 왕년의 노을이 다를 게 없어요. 달라지는 건 오직 나예요, 나! 그러니 지금 행복하면 돼요. ……아! 1844가 무슨 뜻이냐고요? 선셋의 번지요. 주소는 변하지 않아요."

그가 다시 유리 창문에 기대 한적한 도로를 바라본다. 붉게 물든 도로와 그 너머 들판과 서로 붙들고 있는 전봇대와 전깃줄 사이의 황금률을 본다. 그러다가 빙긋이 웃는다. 천지간에 머무는 왕년의 자취를 알고 있다는 듯. 그의 핸드폰이 울린다. 저녁의 척후병인 새들의 노래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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