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라인 레빗 미국 백악관 대변인. 연합뉴스지난 3월, 미국 백악관 브리핑룸을 잠시 들여다보자. 당시 워싱턴에선 이른바 '시그널 게이트'가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었다. 트럼프 행정부의 안보 수장들이 기자가 초대된 민간 메신저에서 예멘 후티 반군 공습 계획 등을 논의하면서 군사 기밀이 유출된 사건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기밀 유출은 없었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결국 기밀 유출 정황을 보여주는 녹취록이 공개됐다. 그날 백악관 정례 브리핑에선 이 문제를 두고 날 선 공방이 벌어졌다. 한 기자가 "국방장관이 토마호크 등 무기와 작전 시각을 언급했는데, 이게 기밀이 아니냐"고 따져 묻자, 케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기밀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곧바로 또 다른 기자가 "작전 개시 시간이 왜 기밀이 아닌가?"라고 묻자, 대변인은 같은 답변을 반복했다. 기자들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기밀 유출 여부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급기야 대변인이 "동일한 질문이 반복되고 있다. 새로운 질문으로 넘어가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기자들은 브리핑이 끝날 때까지 이 문제를 놓지 않았다.
백악관 대변인은 명쾌한 답변을 피했지만, 이날 브리핑을 지켜본 미국 국민들은 '시그널 게이트'의 실체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었다. 이렇게 백악관 정례 브리핑에선 매일 대변인과 기자들이 주요 국정 현안을 두고 진검승부를 벌인다. 1 대 다수의 대결 구도지만, 대변인도 기자도 물러서지 않는다. 이 모습은 여과 없이 미국 전역에 생중계된다. 심지어 비판적인 언론을 향해 '가짜뉴스'라고 몰아붙이는 트럼프 정부에서도 백악관 브리핑룸의 카메라는 꺼지지 않는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이 지난 1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현안 브리핑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우리의 모습은 좀 다르다. 지금까지 청와대와 대통령실의 브리핑은 대변인의 모두 발언이나 발표 위주로 앞부분만 짧게 공개돼 왔다. 이어지는 질의응답은 대부분 비공개로 전환되고, 여기서 나온 발언들은 '대통령실 관계자'로 익명 인용돼 보도된다. 공직자는 '익명'으로 숨고, 언론은 제멋대로 '맥락'을 숨기는 일이 가능한 구조였다.
이런 모습이 앞으로는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새 정부가 대통령실 브리핑을 백악관처럼 운영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최근 "대통령과 언론의 소통 현장을 다양한 각도에서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브리핑룸에 카메라 4대를 추가로 설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제안했다고 한다.
국민의 알 권리와 브리핑의 투명성을 높이자는 취지다. 잘한 결정이라 생각한다. 단지 카메라 추가 설치에 머물지 않고, 대통령실 브리핑 시스템 전반에 대한 개선까지 이어진다면 국민의 신뢰와 만족도는 한층 높아질 것이다.
이와 관련해선 바이든 시절 백악관의 운영 방식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필자는 당시 백악관을 담당했던 기자로서 바이든 백악관의 브리핑 운영 방식이 '투명성'과 '전문성' 면에서 탁월하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이러한 운영이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미국 백악관 브리핑룸. 연합뉴스매일 오후 2~3시가 되면 백악관 출입 기자들은 웨스트윙(West Wing)에 위치한 브리핑룸으로 하나둘씩 모인다. 공간은 고작 49석 규모로 협소하다. 노트북을 놓을 책상도 따로 없다. 기자들이 많을 땐 옆 벽면이나 뒷면까지 빼곡히 들어찬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백악관 대변인은 제법 두꺼운 브리핑용 바인더를 어깨에 끼고 등장한다. 대통령의 주요 일정과 정책, 입장문, 현안별 예상 질문과 답변까지 정리된 일종의 공책이다.
대변인은 1~2분간 짧은 모두 발언을 한 뒤, 곧바로 질의응답에 들어간다. 질문 순서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브리핑은 보통 30분 정도 진행되며, 길어지면 1시간 가까이 이어지기도 한다. 브리핑은 백악관 유튜브 공식 채널을 통해 생중계된다. 생중계 화면 오른쪽에는 동시 수화 통역도 제공된다. (트럼프 행정부에선 어떤 이유에서인지 수화 통역이 사라졌다.) 브리핑이 끝나면 전문 녹취록이 백악관 홈페이지에 게시된다.
바이든 백악관은 '프레스 개글(press gaggle)'과 '백그라운드 브리핑'과 같은 비공식 브리핑도 활발하게 운영했다. 프레스 개글은 대변인 등이 카메라 촬영 없이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진행하는 것이다. 일종의 미니 브리핑이다. 주로 대통령의 해외 순방이나 지역 방문 시 전용기에서 이뤄졌다. 이때의 발언 녹취록도 백악관 웹사이트에 그대로 공개되어, 전용기에 탑승하지 않은 기자들과 일반 국민들도 모두 열람할 수 있었다. 때론 오디오도 공개된다.
'백그라운드 브리핑'은 주로 '컨퍼런스 콜(conference call)' 형식으로 비대면 진행된다. 일반 브리핑보다 특정 사안에 집중된 형식으로, 백악관 주도의 정책 발표나 미·중 정상회담 같은 주요 외교 일정의 전후에 이뤄진다. 정책의 배경이나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브리핑 일정과 주제는 전날이나 당일 아침, 백악관 프레스 등록 기자들에게 이메일로 공지된다. 기자들은 해당 시간에 공지된 전화번호로 연결해 참여하면 된다. 백악관에 직접 가지 않고도 참여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효율적이다.
백그라운드 브리핑에서는 기자들에겐 브리핑 당사자의 실명과 직책이 공개되지만, 보도 시에는 '정부 고위 당국자'로 인용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도 대개는 브리핑이 끝난 뒤 전문 녹취록이 백악관 홈페이지에 공개된다. 이런 투명성은 곧 정부의 책임성과 연결된다. 책임성을 담보하려면, 전문성이 뒷받침돼야 한다.
바이든 백악관은 모든 브리핑을 대변인 1인에게만 맡기지 않았다. 대통령 관련 사안이나 주요 국정 현안은 백악관 대변인이, 정책 등 특정 분야는 해당 참모들이 직접 기자들 앞에 섰다. 특히 고도의 전문성과 민감성이 요구되는 외교·안보 분야에는 전담 대변인을 따로 두었다. 국내 언론에도 잘 알려진 존 커비(John Kirby)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이 대표적이다.
해군 제독 출신인 그는 국무부와 국방부 대변인을 지낸 외교·안보 소통 전문가다. 국무부·국방부·정보기관 등과 메시지를 조율하고, 대통령의 외교·안보 메시지를 대외적으로 전달하는 핵심 창구였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나 중동 군사 충돌과 같은 주요 대외 사안이 터질 때마다 직접 브리핑에 나섰다. 이후에는 커비가 이끄는 NSC 브리핑이 일주일에 두 차례 정도 정례적으로 진행되었다.
모든 변화에는 고통이 따른다. 정례 브리핑의 전면 공개는 대통령실 관계자들에게도 적잖은 부담이 될 것이다. 가뜩이나 격무로 '응급실행' 직원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이번 결정은 업무를 더욱 가중시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력 충원은 물론 필요하면 조직 개편도 검토해야 할 것이다. 기자 입장에서도 자신의 얼굴과 질문이 그대로 생중계되는 상황은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잘 정착된다면, 대통령실과 언론 모두의 투명성과 책임성이 높아져 결국 국민에게 그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국민들도 이번 새로운 시도가 잘 정착될 수 있도록 응원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면 좋겠다. 무엇보다 의도치 않은 '작은 말실수'에는 조금 더 관대해졌으면 한다.
박형주 칼럼니스트박형주 칼럼니스트
- 전 VOA 기자, 『트럼프 청구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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