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백수아파트' 이루다 감독.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스포일러 주의 오지랖이 넓은 사람, 즉 남의 일에 지나치게 상관하는 사람을 뜻하는 '오지라퍼'(오지랖er). 그리고 직업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 '백수'. 이 두 단어가 조합되면 어떤 뜻을 가지게 될까. 그리고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까.
이루다 감독의 연출 데뷔작 '백수아파트'는 그냥 오지라퍼도 아니고, 그냥 백수도 아닌 무려 '오지라퍼 백수'가 현대사회의 난제인 층간 소음을 유발하는 범인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코믹 추적극이다. 오지라퍼 백수가 해결하는 건 층간 소음만이 아니다. 스스로도, 타인도 구한다.
영화 속 말을 빌리자면, 변호사보다도 바쁜 백수의 진정한 오지랖이다. 그러나 그 오지랖이 결코 쓸데없거나 밉지 않다. 어쩌면 지금 세상에 가장 필요한 오지랖인지 모른다. '당신의 친절한 이웃'이란 문구를 슬로건처럼 달고 다니는 어떤 슈퍼 히어로처럼, 빨간 조끼를 입고 동네를 누비며 얼굴을 몰라도 우리네 이웃을 알뜰살뜰 챙기는 오지라퍼 백수. 그야말로 현실판 (동네) 히어로 아닐까.
어떻게 이루다 감독은 층간 소음과 사회적 이슈, 그리고 오지랖을 연결해 유쾌하면서도 따뜻한 이야기로 풀어냈을까. 개봉을 앞둔 이 감독을 만나 그 이야기를 들어봤다.
영화 '백수아파트'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층간 소음과 재건축이 만들어 낸 '백수아파트'
이루다 감독은 '머니백'(2016) '대호'(2016) '신세계'(2012) '화차'(2011) 등 내로라하는 영화의 연출부와 '변신'(2018)의 조감독을 거친 준비된 신인이다.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온 이 감독은 2020년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전 장려상을 받은 '백수아파트'를 통해 '감독'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백수아파트'의 중심 소재는 현대인을 괴롭히는 최대 난제 중 하나인 '층간 소음'이다. 감독은 사회적 이슈로 부상한 층간 소음 문제에 우리 사회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또 다른 사회적 이슈인 재개발·재건축 문제까지 가져와 연결했다.
이 감독은 "재건축이나 재개발을 둘러싼 논란을 꾸준히 있었다. 장점도 큰 사업이지만, 원주민 입장에서는 살던 곳에서 쫓겨나야 하는 안타까운 사연도 존재한다"라며 "내가 관심 있게 생각한 건, 비리의 카르텔이 존재한다고 가정했을 때 내부고발자가 있지 않고서는 밝혀내기 어려운 구조를 가졌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 영화는 오지라퍼가 주변을 감화시키는 이야기다. 이를 생각했을 때, 비리와 깊숙이 관여된 누군가를 오지라퍼가 감화시켜 썩은 동아줄을 스스로 끊어내게 만들고, 양지로 올라설 수 있게 만드는 이야기 구조와 주제 의식이 맞아떨어질 수 있다고 봤다"라고 덧붙였다.
그렇게 사회적 문제들을 엮어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이 감독은 특정 빌런을 정하진 않았다. 그는 "사회적인 담론이 형성될 수 있는 소재인 만큼, 빌런이 결정될 경우 개인의 문제로 귀결되기보다 시스템의 문제로 확장성을 가져야 한다고 판단했다"라며 "그것이 영화적으로 옳다는 판단 아래 그런 설정들을 이야기 안에 대전제로 심어두고, 원래 내가 하고 싶었던 주제 의식을 담았다"라고 했다.
영화 '백수아파트'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오지라퍼 백수 거울, 워킹데드 이웃 경석을 만나다
개인과 사회를 오가며 분투하는 오지라퍼 백수 주인공의 이름은 '거울'이다. 사수였던 감독들로부터 영화의 제목만큼 캐릭터의 제목 역시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래서 그도 시나리오 단계부터 캐릭터 이름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감독은 거울이란 물건이 가진 단단함과 투명함이 오지라퍼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또 거울이의 부모님이라면 미러링 효과처럼 두 동생에게 모범이 되라는 의미를 담았을 거라 상상했다. 단단함과 모범의 뜻을 담은 거울은 굉장히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고, 우리의 씩씩한 주인공에게 '거울'이란 이름을 선물했다.
거울이는 소년 만화 주인공처럼 털털하고 소년미를 가진, 인기 많은 여고 전교 회장 느낌이길 원했다. 그리고 그런 거울이를 스크린에 구현해 줄 배우로 경수진을 낙점하게 됐다.
이 감독은 "주변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 경수진 배우가 거울이와 실제 성격이 흡사했다. 그리고 직접 만나보니 내가 생각하고 있던 이미지와 굉장히 잘 맞아떨어졌다. 또, 경수진 배우가 실제로 전교 회장 출신이었다. 거기서 한 번 더 감겼다"라며 웃었다.
"거울이는 대부분 신에 등장하며 강력하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인물이에요. 제가 백수의 느낌을 주고자 경수진 배우에게 맨발에 슬리퍼를 신어달라고 요청했어요. 설정이 늦가을, 초겨울인데 추워도 패딩도 못 입었죠. 그런데도 경수진 배우가 너무 흔쾌히 해준 데다, 거의 매일 스태프와 함께 출근해 함께 퇴근했어요. 극기 훈련 나왔다는 마음으로 살신성인해 줘서 되게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영화 '백수아파트'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오지라퍼 거울이와 함께 콤비 케미를 뽐내며 활약하는 또 다른 인물이 있다. 바로 고규필이 연기한 구 회계사, 현 워킹데드 이웃 청년 경석이다.
경석은 회사에서 잘리고, 보증까지 잘못 서 빚더미에 앉은 전직 회계사다. '산 송장' 사주라 불릴 만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을 스스로 마감하려던 찰나, 이사 온 거울의 눈에 띄어 구조되고 거울과 친구가 된다. 경석은 적극적인 구석은 찾아볼 수 없는 삶을 살다 거울의 층간 소음 미스터리 수사에 휘말린 뒤, 거울과 함께 바쁘게 아파트를 활보하게 된다.
그런 경석을 고규필은 완벽하게 소화하며 스크린에서 대활약을 펼친다. 이 감독은 "워낙 오래된 베테랑이다. 특히 고규필 배우의 쭈글쭈글한 인간미 표현의 연기 톤을 굉장히 좋아했기에 경석 역할에 원픽이었다"라며 "다행히 빠르게 오케이 의사를 줘서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으로 함께할 수 있게 됐다"라고 말했다.
고규필은 감정적인 성격이 아닌 이 감독을 울컥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이 감독은 그때를 떠올리며 "사람 자체가 사랑스러워서 유쾌한 톤의 연기도 잘하는데, 사람의 마음을 일렁이게 하는 연기까지 잘하는 내공이 엄청난 배우였다는 걸 깨달으며 감명을 받았다"라며 "내가 쓴 이야기다 보니 주인공 거울에게 이입이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경석에게 애정을 주고 있더라. 그런 나를 보며 고규필 배우가 정말 진짜를 연기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라고 했다.
이 감독은 거울이의 최대 성과는 층간 소음 범인을 잡아서 모든 사람에게 박수를 받는 게 아니라 죽으려던 경석을 살게 만들고, 스스로 살고 싶어지게 만들고, 수동적이던 경석이 능동적으로 아파트 마당의 낙엽을 쓸게 만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경석이 살아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에필로그가 거울이가 가장 뿌듯해할 순간이라 생각한다"라며 "그런 의미에서 경석에 러블리한 고규필 배우를 캐스팅은 정말 최고였다"라고 거듭 극찬했다.
영화 '백수아파트'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나도 저런 오지라퍼 같은 친구 한 명 있으면 좋겠다'
결국 거울이의 오지랖은 경석을 살렸다. 단순히 물리적으로만 살린 게 아니라 '삶'을 살아가고 싶어지게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거울이는 경석을 살린 거다. 이처럼 '백수아파트'를 보고 나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쓸데없이 참견한다는 뜻을 담은 '오지랖 넓다'라는 관용구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이 감독은 '오지랖'이 가진 의미를 이야기하며 자신이 우연히 본 일화를 이야기해 줬다. 외국에서 한 여성이 유모차를 끌고 지하철에 탑승하는 과정에서 자신만 탄 상태로 지하철 문이 닫혔다. 그때 그곳을 지나가던 한 젊은 남성이 유모차를 잡고 여성이 올 때까지 기다려줬다. 몇 분 뒤 여성은 유모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고, 남성을 껴안으며 고마움을 전했다.
이 짧은 영상을 본 이 감독은 "그런 휴머니즘을 좋아한다. 정말 눈물 나게 따뜻한 순간들이 나와 전혀 상관없는 타인의 오지랖에서 오게 된다고 생각했다"라며 "실제 시나리오가 여러 버전이 있었는데 거울이가 유모차를 잡고 있는 버전도 있었다. 수정하면서 빠지게 됐지만, 같이 의지하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에서 오는 그런 따뜻한 순간들을 전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영화 '백수아파트'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이 감독이 '백수아파트'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 역시 이러한 따뜻함이자, 따뜻함을 만들어내는 오지랖의 힘이다.
"거창하게 연대의 힘에 대한 메시지라기보다는 오지라퍼의 따뜻한 선한 영향력, 백수가 가진 잠재력과 그런 것들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적으로 두면 위험하고 내 편으로 두면 든든한 사람인 주인공을 생각하며 시나리오를 썼는데, 어떤 분이 영화를 보고 '나도 저런 오지라퍼 같은 친구가 한 명 있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해 줬어요. 의도가 통했구나 싶어서 혼자 좋아했죠. 관객분들도 '백수아파트'와 거울이에 공감해 주시면 좋겠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