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KBS 제공)
중국 북경 근처 탁군에 거대한 병력이 운집한다. 무려 113만 3800명. "하찮은 것들이 어리석게도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에 오기를 꺼려한다." 노여워하는 수양제의 지휘 아래 이들이 노린 곳은 바로 고구려였다.
출병에만 40일이 걸린 수나라 100만 대군. 동아시아 최강대국 수나라와 고구려의 대격전으로 기록된 '살수대첩'이 시작된 것이다.
오는 25일 밤 9시 40분 KBS 1TV에서 방송될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7세기 동아시아의 판도를 뒤바꾼 격전의 그날을 짚어본다.
서기 589년, 수나라는 중국을 통일하고 동아시아 최강자로 급부상한다. 형식적 조공·책봉 관계에서 나아가 자국 중심의 천하관을 세우려는 수나라의 요구에 고구려는 정면으로 반발하고 나선다. 최전성기를 거치며 독자적 천하관을 완성한 고구려에게는 부당한 요구였던 까닭이다.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갈등의 골은 깊어져 간다.
급기야 607년,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에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수양제는 우연히 돌궐과 접촉하는 고구려 사신을 발견한다. 수양제는 복속 뒤에도 경계심을 놓지 못하고 돌궐과 고구려 사이에 모종의 밀약을 걱정해 왔다. 그렇게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이 시작된다.
역사상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백만 대군의 침공. 수양제는 왜 고구려 침공에 이토록 많은 군사를 동원한 것일까.
612년 2월, 수나라의 군대는 고구려의 1차 방어선인 요하에 당도한다. 고구려군은 부교 설치에 난항을 겪는 수나라 군대를 집중 공격해 도하를 저지한다. 하지만 고구려군은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만 명의 사상자를 낸 채 요동성으로 퇴각한다.
요동성을 두고 대치하는 수나라와 고구려군.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요동성은 절대 빼앗겨서는 안 될 주요 거점이었다. 고구려군은 수적 열세를 기만전술로 극복하며 요동성을 사수한다.
그렇게 요동성은 석 달이 넘게 계속되는 교전에도 꿈쩍 하지 않는다. 백만 대군을 상대로 요동성을 사수할 수 있었던 데는 무엇이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