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성인식이었다. 혹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성공적으로 자존심을 지켜냈다. 폐막식 이후 일주일 넘게 흐른 지금, 뜨거웠던 열기는 식었지만 과정이 어려웠던만큼 영화제의 족적은 더욱 뜻깊게 남았다. 파격적인 시작을 알린 제1회부터 아픔을 겪고 성숙해진 현재까지. CBS노컷뉴스는 이명희 영화 평론가와 함께 부산국제영화제를 되짚어보는 연속 보도를 준비했다. [편집자 주]<글 싣는="" 순서="">
① 공든 탑이 무너지랴…스무 살 BIFF의 어제와 오늘
② 휴머니즘 외면 않은 용기…'난민문제'를 품다 <상>
② 휴머니즘 외면 않은 용기…'난민문제'를 품다 <하>
③ 빈부격차와 허세…스크린에 비친 뿌리 잃은 중국인의 파국
④ 부산 수놓은 77세 거장의 순례담 "사랑을 구하고 싶다"
⑤ 부산영화제서 만난 레오 카락스 "진정 중요한 것은 침묵"(끝)
영화 '나쁜 피' 스틸컷(사진=부산영화제 제공)
레오스 까락스 감독은 '내가 사랑한 프랑스 영화'에 '나쁜 피'(1986)와 '홀리 모터스' 2편을 올렸다.
'나쁜 피'는 시적 스타일로 구성된 영화다. 100년의 영화 역사를 수없이 언급하는 풍요로운 작품인 동시에, 젊음에 대한 찬가이다. 영화예술의 진정한 신봉자임을 보여주는 '나쁜 피'에서 감독은 "배우 드니 라방의 몸짓을 영화에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배우가 데이빗 보위의 '모던 러브'에 맞춰 뛰는 장면이다. 이는 영화가 탄생하기 이전, 에드워드 머이브리지의 운동에 관한 탐구와 연관된다.
부산영화제 기간 중 만난 레오 까락스 감독은 "무성영화의 힘을 재발견하고 싶었다. 스무 살의 짧은 인생에서 100년이 된 영화를 발견한 경이로움을 영화에 반영하고 싶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소년 소녀를 만나다'와 '나쁜 피'다"라고 말했다.
버려진 공장에 세트를 만들어 찍었는데, 영화를 만드는 것이 행복했다고 한다.
"촬영하기 가장 힘든 순간은 대사가 있는 장면이었다. 대사가 있으면 1주일 전부터 공포에 사로잡혔다"라고 말하는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서 중요한 것이 침묵이라고 강조했다.
"영화의 침묵은 성당의 고요함과 같은 것이다. 성당에서 고요함이 중요하듯, 영화에서도 그렇다. 영화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침묵이며, 무성영화의 침묵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예술가다운 영화관을 들려주었다.
감독은 "원래 꿈이 음악가였다"고 했다. 하지만 "음악이 자신을 원하지 않아 영화를 선택하게 됐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음악"이라고 말한 그는 자신이 준비하는 차기작은 뮤지컬이라고 귀띔해 줬다.
그의 영화들은 영화예술의 탐구이며, 서사의 영화와 대조되는 개념인 '순수의 영화', 연대기적 산문과 대조되는 '시의 영화'라는 독특한 스타일이 매니아층을 두텁게 했다. 그는 "'홀리 모터스'가 가장 흥행한 나라는 한국"이라며 애정을 표시했다.
◇ 세상을 놀래킨 남미 소국들 영화…'눈꺼풀' "죽은 자가 눈을 뜬다"
영화 '눈꺼풀' 스틸컷(사진=부산영화제 제공)
영화 예술의 가치를 드높인 작품들이 다수 편성된 점도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눈길을 끈 부분이다.
콜롬비아 영화 '대지의 그늘'(세자르 아세베도 감독)은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작품이고, '익스카눌'(하이로 부스타만테 감독, 과테말라)은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창의적 예술성을 강조한 영화에 주는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했다. 그동안 잊혔던 라틴아메리카 작은 나라들의 이 영화들이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먼저 '익스카눌'은 극한의 리얼리즘 혹은 자연주의와 예술의 만남을 보여주는 영화다. 비전문배우의 놀라운 연기, 진기한 장면들, 현실 그대로를 영상에 담은 인간적이며 사회적인 이야기가 지극히 감동적이다.
커피농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마야 노동자 가족의 딸 마리아는 결혼을 앞두고 한 청년과 순간적인 만남으로 임신하게 된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원하는 낙태에 이르지 못한 그녀는 결국 출산하기로 마음먹지만 독사에 물리게 된다.
도시 병원에서 목숨은 건지지만, 잉태한 아기가 사산했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아기를 사산한 것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서 마리아의 고통은 시작된다.
이 영화에서 모성의 묘사는 극히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표준어를 모르는, 토착어를 쓰는 차별받는 원주민에 대한 감독의 존중과 애정어린 시각도 영화의 새로운 세계를 만난 느낌을 선사한다.
로셀리니 감독의 고전 '스트롬볼리'를 연상케 하는 화산 지대의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영상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뛰어난 영상미를 선사한다. 친환경적이며 본질적인, 인류가 되찾아야할 가치를 영화화한 극히 아름다운 이 영화가 개봉되지 않고 영화제에서만 보여진다면 애석한 일이다.
남미 작은 나라에서 훌륭한 작품들이 부상하는 이유를 영화 제작 수단의 민주주의화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적은 비용으로도 영화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세계적으로 기술이 발달해 접근이 쉬워졌다는 것이다.
'탠저린'(션 베이커 감독, 미국)은 영화 전체를 모바일폰으로만 찍어서 화제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만드는 방식이 쉽게 다양화할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한국영화로는 정지우 감독의 '4등', 이승원 감독의 '소통과 거짓말'이 좋은 평가를 받은
글 = 이명희 영화 평론가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