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현욱. 길스토리이엔티 제공배우 이현욱에게 tvN×티빙 드라마 '원경'은 딜레마의 연속이었다. 지금까지와 다른 태종 이방원의 모습을 그려내야 했기에 그랬고, 여성 서사 사극에서 자기 캐릭터의 설득력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예상치 못한 장면을 맞닥뜨렸을 때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드라마에 '진심'으로 임했다. 사료에 나온 태종 이방원과 사뭇 달리 열등감을 부각시켜 일각에서는 고증 논란도 일었다. 그런 평가까지도 이현욱은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첫 사극이라 의미가 있어요. 거의 1년이란 시간을 진심을 담아서 임했거든요. 실존인물을 다루니 걱정도 많았고, 마음도 많이 쓰였죠. 태종의 이면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태종이란 인물에 대한 선입견이 강하기도 하더라고요. 제 부족이었다고 생각해요. 제 생각보단 시청자들을 설득 시키지 못한 거 같고요. 그래도 선배님들이 하셨던 남성성과 카리스마가 강한 태종 이방원을 표현해달라고 하셨으면 이 작품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넘을 수도, 따라갈 수도 없거든요. 고증을 위해 사료를 찾아보면서 그렇게 만들었어요."
'원경'의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드라마 제목 그대로 태종의 아내인 원경왕후(차주영 분)였다. 그 동안 많은 사극에서 그려왔던 두 사람의 정치적 관계보다는 뜨겁게 싸우고, 사랑하는 인간적인 부부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 물론 '정치'가 아예 배제될 수는 없었지만 왕실 부부의 사적인 영역에 접근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다만 이현욱은 태종과 원경 사이의 너무나 치열했던 대립각에 아쉬움을 표했다.
"두 사람 관계는 애증이 기반인데, '증오'만 자꾸 부각이 되는 거 같아서 개인적으로 답답하고 아쉬웠어요. 원경왕후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라 태종과의 관계성을 부각시키기엔 딜레마가 있었던 거 같아요. 당연히 후궁을 들인 건 사실이지만 지금 시대 상, 납득이 어려워 불편한 지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도 했고요. 그로 인해 실존인물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태종이 원경왕후를 사랑했다고 믿었어요. 세종이 두 사람을 합장했다고 하는데, 원경왕후 사후에 태종은 더 살아있었기 때문에 태종의 허락이 없었더라면 그러긴 어려웠을 거라고 봐요. 역사학자마다 관점이 다르지만 태종 성격 상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배우 이현욱. 길스토리이엔티 제공티빙 버전에서 공개된 수위 높은 베드씬 이야기도 나왔다. 특히 사전 고지 없이 신체 노출 부분은 대역 배우를 쓴 것으로 알려져 제작사가 "배우들과의 협의를 거쳤다"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그와 함께 호흡을 맞춘 차주영은 이에 대해 "노출의 의도가 아니었지만 실존인물이라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는 답변을 내놓은 바 있다. 이현욱은 노출 장면을 보고 놀라서 울기도 했다.
"주영이와 저도 똑같은 마음이죠. 걱정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고, 주영이, 채령 역을 맡은 (이)이담이 같은 친구들이 더 속상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눈물을 흘린 건) 제 연기를 제가 보고도 그랬고, 좀 괴로운 마음에 자책이 있었어요. 그래도 저희가 보여드릴 수 있는 것 안에서 보여드리려고 노력을 했던 거 같아요."
부부로 연기했던 차주영에게는 무한한 존경심을 표했다. 마지막 촬영에는 원경왕후의 나이에 맞게 55송이 장미 꽃다발을 선물하는가 하면, 직접 쓴 손편지를 함께 건넸다. 촬영 도중 생일을 맞은 이현욱에게 차주영이 스태프들과 깜짝 이벤트를 해줬던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처음으로 상대 배우에게 꽃 선물을 해봤어요. 정보도 없는 인물을 표현하는 게 얼마나 불안하고 외로웠을지 상대 배우로서 경의를 표하는 의미였어요. 장미 종류를 2송이만 다르게 해서 방원과 원경, 이들 부부의 의미를 담았어요. 주영이는 이미 울고 있었고, 저도 눈물을 엄청 참았어요. 촬영이 남아있었거든요. (웃음) 주영이는 영리하고 재능도 많은 친구예요. '원경' 초반부터 완성형이었어요. 연기 전공을 해서 배우가 된 친구가 아닌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어요. 그런 거 보면 저는 왜 연극영화과를 나왔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너무 매력 있고 똑똑한 배우 같아요."
현장에서 이현욱은 웃음을 담당했다. 인터뷰 자리에선 다소 차분한 분위기였지만 비하인드 영상에서는 장난을 치는 등 활발한 모습도 있었다. 그에 따르면 원래 장난기 많은 성격은 아닌데 나름대로 현장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경험해 보니 화내거나 긴장감 넘치는 현장보다는 즐겁고 웃음 많은 현장이 좋았다고.
"현장에서는 얼어있는 걸 싫어해서 일부러 재미있게 행동하기도 해요. 날 보고 웃으라는 거죠. 예전에는 일을 잘하려고 화도 내고, 언성 높인 적도 있었는데 결과가 좋아도 찜찜하더라고요. 그냥 사람들도 다 이유가 있겠지, 이렇게 합리화하고 웃으면서 하자고 생각했어요. 아니면 너무 힘들고 스트레스 받으니까요. 스태프들과 인간 대 인간으로 친해져서 서로를 위해 도와주려고 안달이 나는 사람들처럼 일해보자 싶었거든요. 사람이 좋아서 그런 것도 있고요."
배우 이현욱. 길스토리이엔티 제공이현욱의 필모그래피는 주연급 남자 배우의 전형적인 성공 가도와는 조금 다르다. 대중에 많은 공감을 받거나 호감을 살 수 있는 캐릭터 대신에 뻔하지 않은 악역부터 복잡한 내면을 가진 입체적 캐릭터까지 다양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넓혀 왔다. 다음엔 또 어떤 이현욱의 얼굴을 보게 될 지 기대감을 가질 수 있는 이유다.
"아마 도시적인 이미지로 봐주셔서 사극이 안 들어왔던 거 같아요. 엄청 확고한 자리를 가진 배우가 아니라 단순하게 제가 도전할 수 있고, 입체적이면서 연기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 캐릭터 위주로 많이 골라왔거든요. 주관적으로는 조금씩이지만 그런 선택들이 가지를 잘 뻗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원경'으로 또 하나의 확장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사극이나 시대극에 대해서도 매력을 많이 느꼈고, 고정관념을 벗어나 다른 시야가 생긴 거 같아요. 너무 과감하거나 너무 소극적이거나, 어떤 시도에 있어 밸런스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였어요."
인터뷰 동안 이현욱은 끊임없이 자신의 책임을 곱씹었다. 그러나 반성의 단계에서만 그치는 건 아니다. 이를 통해 그는 솔직한 평가를 받아 들이고 더 좋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원동력으로 삼아왔다. '남 탓'을 한다고 해도 결국 돌아오고야 마는 것들은 온전히 자신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
"제가 못나서 자학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 그렇게 돼요. 욕을 먹든, 어떤 일이 발생하든 '내가 이러지 않았다면' 하는 마음이 생기는 거죠. 받아들이는 과정인 거 같아요. '그들이 나를 몰라준다'고 하면 웃기잖아요. 좋지 않은 평가를 두고 누구 탓을 하기 보다는 제가 부족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배우란 직업이 그렇더라고요. 오디션이든 작품이든 내가 생각한대로 가지 않았을 때, 결국 저에게 돌아와요. 남 탓만 계속해도 그래요. 당시엔 최선이었지만 다른 선택을 했으면, 아마 다른 평가도 있지 않았을까 싶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