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A 월화드라마 '아너: 그녀들의 법정' 포스터. ENA 제공※ 스포일러 주의 모든 살아남은 피해 생존자와 성폭력을 비롯한 사회의 폭력에 맞서 싸우는 모든 이에게 보내는 존경과 연대의 메시지. 그리고 피해 생존자들을 꺾고, 부수고, 무너뜨리려는 모든 가해자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 바로 '아너: 그녀들의 법정'이다.
ENA 월화드라마 '아너: 그녀들의 법정'(연출 박건호, 극본 박가연, 이하 '아너')은 1화부터 성폭력 피해 생존자를 둘러싼 해묵은 문제인 2차 가해, 피해자다움의 강요가 일상화된 현실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첫 에피소드의 경우 마치 관습처럼 피해 생존자의 대응에 무고로 맞대응하는 가해자들의 야만이 나타난다. '암묵적 동의'라는 말로 모든 피해를 지워버리려 하는 실태 역시 적나라하다. 법정에서마저도 보호받지 못한 채 또 다른 가해에 놓이는 피해 생존자의 모습은 드라마를 위한 연출이 아닌 현실이다. 이는 드라마 내내 만날 수 있는 부조리함이다.
ENA 월화드라마 '아너: 그녀들의 법정' 스틸컷. ENA 제공'가해자다움'이란 말은 없어도 '피해자다움'이란 말은 존재한다. 피해자는 피해자다워야 한다는 의미다. 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말로 피해 생존자의 삶에 주홍글씨를 새긴다. 피해 생존자는 웃어도 안 되고, 일상을 살아가도 안 되고,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낙인이 찍힌 채 세상과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다. 마치 평생 폭력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처럼 말이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 '세상의 주인'에서도 보여줬듯이, '아너'에서도 이러한 세상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향해 피해 생존자들은 끊임없이 저항하고 싸우고 살아남고자 한다. 윤라영(이나영), 강신재(정은채), 황현진(이청아) 세 명의 여성 변호사는 각자 상처를 지니고 있음에도, 그 상처가 여전함에도 어떻게든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려 한다.
'아너'는 성폭력과 성폭력 피해 생존자를 중심으로 이야기하지만, 이는 동시에 꺾으려는 자와 꺾여도 다시 일어나는 자 간의 싸움이자 꺾여도 다시 일어나는 자들의 치열한 투쟁기이기도 하다.
윤라영, 강신재, 황현진 그리고 그들을 찾아온 피해 생존자들은 모두 꺾여도 다시 일어나는 자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강한 것이다. 한 번도 꺾여보지 않은 자들은 단 한 번의 꺾임에 부러진다. 그러나 꺾여도 다시 일어나는 이들은 자신들을 향한 부조리와 편견에도 끊임없이 일어나 살아남고자 애를 쓴다.
"넌 그 밤에서 영원히 못 벗어나"라고 말하는 가해자 박제열(서현우)에게 윤라영이 "난 부서졌지만, 지진 않았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ENA 월화드라마 '아너: 그녀들의 법정' 스틸컷. ENA 제공이러한 점에서 극 중 성범죄 앱 '커넥트 인'으로 대표되는 인물들과 'L&J'(Listen&Join)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들은 다를 수밖에 없다.
'커넥트 인'은 더러운 욕망으로만 가득한 느슨한 연결에 불과하다. 반면 L&J와 피해 생존자들, 그리고 이들의 싸움에 함께한 모든 사람의 연결은 단순한 연결을 넘어 '연대'라는 단단한 결속을
이다. 같은 '연결이지만,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기에 커넥트 인 이용자와 이를 옹호한 이들은 추악한 욕망이 드러나자 산산이 흩어진다.
이러한 커넥트 인에 맞서는 세 여성의 투쟁을 단순하게 선과 악의 대결로 갈 수도 있었겠지만, '아너'는 현실이 결코 단순하게 선악이나 흑백으로 이뤄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드라마에서는 피해 생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가 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윤라영, 강신재, 황현진도 양가적인 상황과 감정에서 갈등하고, 백태주(연우진)와 한민서(전소영)는 피해자였지만 가해자가 된다.
특히 백태주와 한민서를 통해 절대 악을 처단하기 위해 또 다른 악이 되는 것이 과연 정당화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백태주는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자신의 신념을 밀어붙이는 인물이다. 문제는 선한 신념으로 포장한 이상주의는 폭력이 됐고, 폭력은 피해자를 낳았다는 점이다. 목적과 결과를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것은 결국 커넥트 인 이용자와 그들을 옹호한 자들과 다를 바 없다.
ENA 월화드라마 '아너: 그녀들의 법정' 포스터. ENA 제공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운 질문에 '아너'는 백태주와 한민서가 같은 길을 가다가 어떻게 갈림길에서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는지를 통해 답한다.
L&J 이름 아래 연대해 악에 맞서는 자들의 투쟁이 숭고한 것은 그들이 단순히 살아남는 것을 넘어 악에 악으로 맞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단단한 마음으로 살아내야 할 수 있는 선택이고, 그 자체로 자신들을 무너뜨리려는 악에 저항했다는 증거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 생존자를 비난하는 세상과 스스로 악마가 되어야 절대 악에 맞설 수 있다고 말하는 누군가에게 '아너'는 이야기한다. 정의는 비싸지만 그렇기에 값지고, 부서져도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 맞서 살아남은 이들의 연대가 결국 이 세상이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빛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 명예로운 투쟁의 길의 마지막, '아너'의 엔딩 역시 '아너'답게 끝난다.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한, 피해 생존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낙인을 찍으려는 가해자들이 존재하는 한, 그녀들의 법정은 이어질 것이고, 우리의 연대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한다.
드라마의 엔딩은 그렇게 현실의 몫이 됐다. 오늘도 살아남고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든 피해 생존자와 그들을 응원하는 우리의 연대는 현실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꺾이지 않고 이어질 것임을 되새기게 된다.
ENA 월화드라마 '아너: 그녀들의 법정' 포스터. ENA 제공'아너'가 12회까지 여정을 지나면서도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세 여성 윤라영, 강신재, 황현진을 연기한 이나영, 정은채, 이청아의 공이 크다. 쉽게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과 감정에 다가가 연대의 빛을 밝혀낸 세 배우의 열연이 '아너'를 완성했다.
여기에 현실의 손쉬운 재연이 아닌, 드라마의 메시지를 고민한 박건호 감독의 연출과 아직도 갈 길이 먼 현실에 손 내밀어 준 박가연 작가의 극본이 있었기에 '아너'가 엔딩까지 무사히 도달했다.
2026년 2월 2일~3월 10일 방송, 총 12부작, 기획 KT스튜디오지니, 제작 하우픽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