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화 '국보' 스틸컷. NEW 제공때로 영화의 러닝타임은 영화관을 나선 후에도 이어집니다. 때로 영화는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비로소 시작합니다. '영화관'은 영화 속 여러 의미와 메시지를 톺아보고, 영화관을 나선 관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스포일러 주의 '재능이냐, 노력이냐'라는 오래된 난제에서 '재능'은 타고난 것이다. 그러나 재능과 달리 또 다른 타고난 것인 '핏줄'이냐 재능이냐를 따진다면, 과연 무엇이 우위일까. '국보'는 타고난 재능과 타고난 핏줄의 운명이 맞부딪히는 가운데 어떻게 한 명의 예술가가 '국보'라는 명칭을 거머쥐는지를 처절하면서도 장엄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그려낸다.
눈앞에서 아버지를 잃은 소년 키쿠오(쿠로카와 소야)는 가부키 명문가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켄)에게 맡겨진다. 그렇게 운명이 결정짓는 세계에 이방인으로 뛰어든 키쿠오(요시자와 료)는
명문가의 아들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와 부딪히며 라이벌로 성장하게 된다. 이후 서로의 길을 시험하는 치열한 경쟁에 놓인 두 사람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름 국보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재일한국인 이상일 감독이 '국보'로 일본에서 1200만 명이 넘는 관객에게 선택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낯선 가부키의 세계에서 언뜻 이해하기 어려우면서도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외화 '국보' 스틸컷. NEW 제공영화의 주인공 키쿠오는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후 가부키 명문가 하나이 한지로의 집으로 들어간 키쿠오에게 가부키는 운명이자 삶이 된다. 동시에 한지로의 아들이자 명문가의 후계자인 슌스케와 친구이자 라이벌이 되는 것 역시 숙명일 수밖에 없다.
각각 재능과 혈통을 타고났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없는 것을 가진 상대에게 질투심을 갖는다. 키쿠오와 슌스케는 최고의 온나가타(일본 전통극인 가부키에서 여성을 연기하는 남성 배우)가 되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한다. 키쿠오는 모두가 인정하는 재능을 지녔다. 얼굴부터 타고난 온나가타라 할 수 있다.
그런 키쿠오를 슌스케는 질투하지만, 키쿠오 역시 슌스케를 질투한다. 키쿠오의 재능 앞에 슌스케가 좌절할 때, 정작 키쿠오는 중요한 순간마다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혈통'에 무너진다.
영화 내내 가부키 사회에서 사람들의 입을 통해 오르내리는 단어는 '세습' 또는 '혈통'이다. 그만큼 핏줄을 따라 내려오는 세습의 힘이야말로 가부키 사회의 전통이자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아무리 타고난 재능이 있어도 타고난 핏줄이 없다면 재능마저 빛바랠 수밖에 없는 게 가부키 세계다.
외화 '국보' 스틸컷. NEW 제공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키쿠오와 슌스케의 사이는 늘 미묘할 수밖에 없다. 주어진 운명은 그들을 같은 곳에 서서 같은 곳을 향하길 원치 않는다. 아슬아슬 줄타기하던 우정과 질투의 균형은 키쿠오가 한지로의 대타로 무대에 서게 되며 무너져 내린다.
'국보'는 수십 년에 걸쳐 이어지는 키쿠오의 삶에서 끊임없이 키쿠오에게 재능과 혈통 사이에서 고통받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길 강요한다. 쓰러지고 상처받고 좌절하면서도 키쿠오는 끊임없이 일어서고 온나가타로서의 삶을 걸어 나간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자, 어쩌면 자신이 타고난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 지난한 길 끝에서 키쿠오는 결국 '인간 국보'라는 명칭을 거머쥐게 된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 키쿠오가 국보가 된 것은 단순히 재능을 타고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키쿠오의 재능은 혈통이 전부인 가부키 사회에 키쿠오가 진입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을 뿐이다. 국보가 되기까지 키쿠오의 삶은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고통과 좌절의 연속이다. 악마와 거래했다는 말처럼 때로는 가족을 버리고, 누군가의 진심을 이용해 무대에 서고자 했다.
외화 '국보' 스틸컷. NEW 제공삶이 희로애락의 어느 한 가지로만 이뤄지지 않듯이, 그리고 '희'라는 감정에도 수백수천 가지의 색깔이 있듯이 키쿠오의 삶 역시 다양한 감정을 경험했다. 특히 키쿠오는 보통의 평범한 삶에서 겪어보지 못할 굴곡들을 겪으며 삶의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이 모든 시련이 온나가타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기반이 됐고, 끝내 '국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이는 슌스케 역시 마찬가지다. 타고난 핏줄이 주는 안정성에 기댔던 슌스케는 재능 앞에 좌절하고, 이후 자신의 핏줄이 아닌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정받고자 했다. 그 시간 안에 담긴 노력과 수많은 경험과 시련이 결국 키쿠오와의 무대에서 진정성이란 이름으로 빛을 발하게 된다.
두 사람은 타고난 것으로부터 고통받았지만, 두 사람이 진정 예술가로서 무대에 서게 된 건 타고난 것으로부터 벗어났을 때였다. 결국 재능이냐, 혈통이냐를 두고 평생을 괴로워했지만, 키쿠오를 국보로 만든 것, 슌스케를 진심으로 무대에 서게 만든 것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련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고자 한 노력이자 가부키라는 예술을 향한 열망이었다.
외화 '국보' 스틸컷. NEW 제공3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 지독하리만치 혹독하고 간절한 두 사람의 예술 세계에 몰입할 수 있었던 건 배우들의 열망과도 같은 열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키쿠오 역 요시자와 료와 슌스케 역 요코하마 류세이를 비롯한 모든 배우가 각자의 자리에서 제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특히 옥상에서 홀로 연기하는 몸짓과 눈빛은 물론, 무대 위 온나가타로 완벽하게 선 요시자와 료의 연기는 전율을 일게 할 정도로 강렬하다. 요코하마 류세이 역시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우는 무대에서 한 명의 온나가타가 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이처럼 낯선 가부키의 세계, 감히 짐작하기 어려운 예술가들의 욕망에 빠져들게 만든 것은 이상일 감독이라는 한 예술가의 뚝심 아니었을까 싶다. '국보'가 왜 일본에서 새 역사를 썼는지, 영화를 보면 납득할 수 있다.
175분 상영, 11월 19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외화 '국보' 포스터. NEW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