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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내고 버텨낸 모든 '세계의 주인'을 위한 다정한 응원[최영주의 영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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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세계의 주인'(감독 윤가은)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바른손이앤에이 제공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때로 영화의 러닝타임은 영화관을 나선 후에도 이어집니다. 때로 영화는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비로소 시작합니다. '영화관'은 영화 속 여러 의미와 메시지를 톺아보고, 영화관을 나선 관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 스포일러 주의
 
태풍이 몰아치고 간 다음 날, 거센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는 계속 어둡고 파괴된 채일까 아니면 완벽하게 똑같진 않더라도 다른 모습으로 다시 새로운 날들을 맞이하게 될까. '우리들' '우리집' 윤가은 감독은 예기치 못한 불행 앞에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 속에서 '나'라는 세계의 주인으로 나아가는 존재를 통해 살아내고 버텨낸 모든 이를 응원한다.
 
반장, 모범생, 학교 인싸인 동시에 연애가 가장 큰 관심사인 열여덟 이주인(서수빈)은 어느 날, 반 친구 수호(김정식)가 제안한 서명운동에 전교생이 동참하던 중 오직 '주인'만이 내용에 동의할 수 없다며 나 홀로 서명을 거부한다.
 
어떻게든 설득하려는 수호와 단호한 주인의 실랑이가 결국 말싸움으로 번지고, 화가 난 주인이 아무렇게나 질러버린 한마디가 주변을 혼란에 빠뜨린다. 설상가상 주인을 추궁하는 익명의 쪽지가 배달되기 시작한다.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바른손이앤에이 제공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세계의 주인'은 역시 윤가은 감독의 세계는 따뜻하고 세심하다는 걸 다시금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영화를 마지막까지 보고 나면, '세계의 주인'이라는 제목이 갖는 중의적 의미가 마음으로 먼저 다가오게 된다.
 
밝고 쾌활한 주인공 주인의 세계는 평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주인을 둘러싼 세계의 작은 균열들이 조금씩 보인다. 그 균열은 수호가 서명운동을 제안하며 점차 크기를 키워간다.
 
주인은 서명운동 속 한 문구를 본 후 아직도 자신의 내면을 할퀴고 있는 상처를 드러내게 된다. 성범죄 관련 서명운동 속에는 성범죄 피해를 '씻지 못할 상처'라고 표현하고 있다. 현실에서도 성범죄 피해 생존자들을 향한 이러한 인식은 오히려 그들을 '피해자'라는 울타리에 묶어두게 된다.
 
범죄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의 중심에는 피해자 중심이 아닌 '가해자'와 '범죄'가 있어야 함에도 우리는 여전히 '피해자'를 중심에 놓고 있다. '씻지 못할 상처'라는 건 피해 생존자를 계속 피해자로 남기려는 인식이 담긴 말이다. 그렇기에 주인은 이를 부인하며 잘못된 말이라고 한다.
 
주인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갖고 있던 편견을 의식하고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는 비단 성범죄뿐만이 아니다. 여기서는 성범죄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세계의 주인'은 주인공 주인이 자신의 세계에서 정체성을 찾아가고 회복해 가는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나를 둘러싼 세계와 내 안의 세계 속에서 어떻게 내가 세계의 주인(중심)이 되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를 '하나'로 고정해 바라보거나 규정하려는 오류를 범할 때가 자주 있다. 주인이를 예로 들면, 밝게 산다고 상처 없는 것도 아니고 상처가 있다고 어둡게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바른손이앤에이 제공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그러나 누군가의 특정 과거를 통해 복잡하고 다층적인 면을 가진 인간을 단 하나로 규정할 수 있다고 믿을 때가 있다. 그러나 '피해자'이기에 영원히 피해자로 남는 것도 아니고, 피해자이기에 피해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 모두 편견이다.이는 꼭 피해자가 아니어도, 그 자리에 내가 아는 누군가의 이름이 들어간다 해도 다를 바 없다. 과거가 지금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어도 인간이란 존재는 그것만으로 규정할 수 없고, 규정되지도 않는다.
 
주인은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면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저항하며 자신만의 세계에서 '이주인'으로서 바로 서고자 한다.
 
윤가은 감독이 그동안 유지해 온 1인칭 시점을 버리고 이번 작품에서 3인칭 시점으로 변화한 것은 바로 이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주인을, 한 존재를, 피해 생존자를, 트라우마를 바라보는 시선들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인이가 살아가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영화는 3인칭 시점을 선택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현재에 발 디디고 있는 한 존재가 어떻게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시선에 무너지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지키며 진정한 주인으로 거듭나는지 제대로 마주할 수 있다.
 
나를 향한 여러 가지 종류의 시선과 예기치 못한 불행, 끊임없이 상처를 건드는 것들로부터 나의 세계를 지킬 힘 중 하나는 사랑이다. 딸, 누나, 친구, 같은 피해자를 위하는 주인의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은 주인이가 스스로를 지탱할 힘이 되어 준다.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바른손이앤에이 제공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주인의 동생 해인(이재희)은 누나를 위해 남몰래 가해자의 편지를 감추고, 누나를 지키기 위해 몇 번씩이나 편지를 썼다 지웠다 한다. 해인이가 누나 앞에서 선보이는 마술은 비록 눈속임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진정한 마법이 될 수 있다.
 
누나 주인의 슬픔을 덜어주고자 하는 해인이의 어설프지만 진정성이 담긴 마술은 비록 그 트릭이 드러나지만, 주인에게는 마법처럼 다가가 마음을 위로했다. 이런 마술 같은 마법이 바로 사랑이고, 그 마법은 당연하다는 듯이 누군가의 세계를 간단하게 규정하고 뭉개려는 모든 외력으로부터 나의 세계를 지킬 힘이 된다.
 
영화가 성범죄에 대한 편견을 깨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남성' 피해 생존자다. 보통 성폭력은 여성 대상 범죄이고, 성폭력 피해 생존자는 여성이라 생각한다. 통계적으로도 여성의 비중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통계의 한쪽에는 남성 피해 생존자자도 자리 잡고 있다.
 
피해 생존자들의 연대 모임으로 보이는 무리 속 한 명의 남성을 두고 영화는 직접적으로 '피해자'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저 '의식'하게 만들고 질문 가지게 만든다. 절반의 확신을 갖고 의식하게 된 남성 피해자는 마지막 엔딩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남녀 목소리로 나오는 피해자들의 음성에서 절반의 의심을 확신으로 채우게 된다. 성별과 연령대에 상관없이 존재하는 모든 생존자를 아우른 것이다.
 
또한 '세계의 주인'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세심함은 주인공 주인이를 어느 하나로 규정하거나 가두지 않고 수많은 가능성을 남기고 끝났다는 것이다. 엔딩에 담긴 윤가은 감독의 세심한 배려와 다정함에 마지막까지도 따뜻함을 안고 극장을 떠날 수 있다.
 
'세계의 주인'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지점이자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일상'이다. 영화에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웃음과 유머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쩐지 피해 생존자의 삶을 다루는 영화는 진지하고 웃으면 안 될 거 같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 밝은 주인이의 일상과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웃음은 작은 균열을 만든다.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바른손이앤에이 제공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희로애락이 하루에도, 한순간에도 수차례 교차하는 게 삶이다. 그렇기에 영화 속 일상과 일상적인 유머는 너무나 당연한 삶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그런 유머가 있는 '세계의 주인'이 너무나 따뜻하고 세심하고 다정한 이유다.
 
이러한 세계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신예 서수빈의 연기는 스크린을 넘어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가 가진 에너지는 깊고 넓은 주인이의 세계를 진정성 있게 그려내며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엄마 강태선 역으로 다시 윤가은 감독의 세계에 찾아온 장혜진은 절제되면서도 깊이 있는 연기로 몰입을 돕는다.
 
윤가은 감독은 여전히 강렬하고 단단하면서도 동시에 따뜻하고 다정하다. 주인이와 주인이의 세계를 지켜보는 내내 느껴지는 세심함을 보며 '역시 윤가은'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비범하면서도 평범한 듯 보이는 일상적인 엔딩은 그렇기에 더욱 감동적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삶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를 보여준 윤가은 감독이 향할 다음 세계가 더욱더 기대된다.
 
119분 상영, 10월 22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영화 '세계의 주인' 포스터. ㈜바른손이앤에이 제공영화 '세계의 주인' 포스터.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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