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선 여자의 심연을 그려낸 '프랑스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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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 리뷰] 영화 '프랑스여자'(감독 김희정)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스포일러 주의

지역, 시간, 나이, 현실, 꿈 등 그 모든 것의 경계에 서 있는 여자가 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여자가 과거와 현재 어딘가, 꿈과 현실의 어딘가라는 기묘한 경계에 발 담근다. 그 여자를 따라 심연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기묘한 여행, 영화 '프랑스여자'다.

'프랑스여자'(감독 김희정)는 20년 전 배우의 꿈을 안고 프랑스 파리로 떠난 미라(김호정)의 이야기다. 그는 서울로 돌아와 옛 친구들과 재회한 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특별한 여행을 한다.

1997년, 미라는 배우를 꿈꾸며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미라는 꿈 대신 프랑스인 남편과 결혼해 통역가로 파리에 정착했다. 하지만 남편이 자신의 후배와 만나고 있음을 알게 되고, 미라는 이혼 후 오랜만에 한국을 찾는다. 미라는 공연예술아카데미에서 함께했던 친구들, 영화감독이 된 영은(김지영), 연극 연출가가 된 성우(김영민)와 술 한잔 기울이며 20년 전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어느덧 미라는 과거로, 꿈으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미라가 과거와 조우하고, 꿈을 통해 기억을 만나는 방식과 그 안에 녹여낸 인물의 감정은 흥미로우면서도 긴장감 있게 진행된다.

극 중 미라는 1997년의 자신과 2015년의 자신을 각각 마주한다. 1997년과 2015년, 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꿈속에도 2년 전 세상을 떠난 해란(류아벨)이 존재한다. 미라에게 해란은 자신의 마음에 미묘하게 걸쳐있는 존재다.

해란은 미라와 달리 연극배우로서 성공했다. 공연예술아카데미 시절 함께했던 친구이자, 성우의 여자친구였다. 해란이 있음에도 미라와 성우는 서로에게 미묘한 감정이 있었다. 이런 해란은 미라에게 이중적인 존재다. 해란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젊은 시절의 꿈이자, 현재의 자신을 닮은 또 다른 나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런 해란은 미라의 무의식을 가리키는 표상과도 같다.

인생의 절반은 한국에서, 절반은 프랑스에서 보낸 미라는 '경계인'이다. 한국에도 프랑스에도 걸쳐진 채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다. 그 불안정하고 고독한 경계인의 삶은 현재와 과거, 꿈과 현실을 오가는 모습으로 표현됐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경계인의 삶을 그리지만 장면이 경계를 그리는 건 뚜렷함보다는 자연스러움이다. 마치 물에 잉크를 떨어뜨렸을 때 자연스럽게 퍼지는 것처럼 그렇게 현재에서 과거로, 꿈에서 현실로, 현실에서 무의식으로 스며들어 간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이미 끝난 ‘디아스포라’(특정 민족이 자의든 타의든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현상) 전시회장에 몰래 들어가는 미라의 모습이 있다. 20년 전 자신이 공부한 공간이자 ‘디아스포라’ 전시장인 곳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는 미라의 모습은 마치 자신의 심연을 향해 내려가는 상징과도 같다. 이러한 장면은 미라가 술집을 나와 좁다랗고 은근한 조명만이 비추는 어슴푸레한 길을 걷는 장면에서도 볼 수 있다.

또 미라가 서울의 거리를 걷다가 어느새 파리의 거리를 걷고 있는 것으로 전환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녀가 어느 곳에도 오롯이 정착하지 못한 채 두 곳의 삶, 두 시절의 기억을 오가는 경계인으로서 존재함을 말하는 듯 보인다.

영화 시작과 마지막에 카메라는 오롯이 미라의 얼굴을 비춘다. 미라에게 주목해 미라 속으로 들어가 미라의 시점으로 마무리한다. 한 명의 여성이자 경계인인 미라, 중년이라는 경계에 걸쳐져 있는 40대 여성의 얼굴과 심리에 주목했다는 점에서도 영화는 의미가 있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한 여성의 내밀한 기억과 감정을 섬세하게 좇는 '프랑스여자'는 사회의 기억들도 담아낸다. 2014년 세월호 참사의 기억, 2015년 프랑스 파리 테러의 기억 등 많은 생명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사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날의 기억을 미라의 현재에 녹여낸다. 사회적 참사를 개인의 삶 한가운데로 가져오는 모습은 감독의 전작에서도 볼 수 있다.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에는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의 현장을 담았다.

감독은 '열세 살 수아'와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 '설행_눈길을 걷다'에서 죽음이란 형태의 이별과 그로 인해 남겨진 자의 슬픔을 다룬 바 있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인생의 거대하고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남은 이는 떠나간 이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 물었다.

영화에서 사회적 참사를 보여준 것 역시 이 같은 맥락과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는 소중한 이를 갑작스럽게 떠나보냈고, 남겨진 이들은 슬픔을 안고 살아간다. 떠난 누군가, 혹은 남겨진 누군가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중 한 명의 모습일 수도 있다. 감독은 개인적 영역의 이별과 슬픔을 우리가 발 디디고 살아가는 사회라는 차원으로 확장해 거듭 질문을 던진다.

생각보다 우리의 기억은 질서정연하지 않다. 꿈 역시 마찬가지다.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그저 미라의 발걸음과 시선을 따라 녹아들면 좋을 영화다.

6월 4일 개봉, 89분 상영, 15세 관람가.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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