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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전 판결, 다시 법정에 서다…故김준기 재심이 묻는 것들[법정B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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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36년 전 유죄 판단, 지금도 맞는 걸까
"민자통, 정말 문제 단체였나"…법원, 검찰에 증명 요구
가혹행위·접견 제한 속 자백 믿어도 되나…증거능력 공방

연합뉴스연합뉴스
36년 전 국가보안법 유죄 판결이, 다시 법정에 올랐습니다. 이미 끝난 줄 알았던 사건의 주인공은 농민운동가 고(故) 김준기 씨입니다. 당시 그는 '위험한 생각을 퍼뜨린 사람'으로 규정됐습니다. 농촌 현실을 비판하는 글을 썼고, 통일운동 단체에 가입했다는 이유였습니다. 그 판단을 근거로 징역형이 확정됐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이 흐른 지금, 그 판결의 전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당시 그를 처벌했던 기준과 증거들이 과연 정당했는지, 법원이 다시 따져보기로 한 겁니다. 재판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 고 김준기씨가 속했던 단체가 정말 '이적단체'였는지. 그리고 당시 수사 과정에서 확보된 증거들이 적법했는지, 설령 일부를 빼더라도 유죄가 유지될 수 있는지입니다.
 

"민자통은 이적단체였나"…다시 따져봅니다

사건의 출발점은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신구전문대 원예과 부교수였던 고 김준기씨는 대학신문에 농촌 현실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했다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 검거됐습니다. 이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1990년 대법원에서 징역형이 확정됐습니다.
 
당시 유죄 판단의 핵심 근거 중 하나는 고인이 가입했던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이른바 '민자통'이었습니다. 검찰은 이 단체를 북한의 통일 노선에 동조하는 이적단체로 규정했고, 법원 역시 이를 전제로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번 재심에서 재판부는 그 전제를 다시 따져보겠다는 입장입니다.
 
1차 공판에서 재판부는 "민자통이 이적단체였다는 점은 검찰이 입증해야 한다"고 명확히 밝혔습니다. 단체의 성격이 공소사실의 전제인 만큼, 이를 뒷받침할 자료와 법률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취지입니다. 특히 민자통이 특정 시기에는 이적단체로 평가될 수 있는지 여부를 두고 추가 자료 제출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 2026.3.12. 피고인 고 김준기 국가보안법 위반 재심 1차 공판
재판부: 검찰에서는 당시 민자통이 이적단체라는 것을 전제로 공소사실이 구성돼있어서 (…) 민자통 단체 성격에 대한 법률적 판단이 있는지 검토가 돼야 할 것 같습니다. (…) 민자통이 오래된 단체고 60년대부터 있어서 시기별로 이적단체로 볼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서 당시에 이적단체 검토된 것이 검찰에 있을 것 같은데 의견과 증거 제출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한편 고 김준기씨 측은 민자통이 공개적으로 활동한 민간 통일운동 단체였다고 반박합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통일 논의가 활발했던 점을 고려하면, 그 강령과 활동이 특별히 위험성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 2026.3.5. 고 김준기씨 측 항소이유서 中
어떤 단체가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그 단체의 목적과 활동이 국가의 존립·안전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 위법한 증거를 배제하고 보면, 당시 정부의 7.7 선언 등 통일 논의가 활발해지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민자통이 합법적인 민간 통일운동 단체를 표방하며 공개적으로 결성된 점, 그 강령이나 활동 내용이 당시 정부나 학계에서 논의되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던 점 등을 고려할 때, 민자통의 활동이 우리 사회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가할 명백한 위험이 있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고인 역시 과거 항소이유서를 통해 민자통을 "남은 생을 통일운동에 바치겠다는 이들이 모인 순수한 민간운동체"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 1990.2.22. 고 김준기씨 항소이유서 中
(…) 민자통은 노대통령 1989.9월 초에 결성된 단체로써 본 피고인이 가입하던 당일 공동의장단 회의장에서 받은 결성선언문과 강령을 그 자리에서 개괄적으로 검토했고 또 당시의 분위기에서 얻은 판단을 첫째, 남북 7.4 공동성명을 기본입장으로 담고 있었고, 둘째 민족분단의 한과 책임을 절실하게 통감하고 있는 노 선배님(지도자)들이 남은 여생을 민족통일운동에 바쳐보겠다는 일념으로 모인 지극히 순수한 민간운동체일뿐이며 (…)
 
박종민 기자박종민 기자

"가혹행위ㆍ변호인 접견 제한" 상태 자백…증거능력 인정되나 

또 다른 축은 증거입니다. 보다 정확히는,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를 배제했을 때도 유죄 판단이 가능한지 여부입니다.
 
이 사건은 수사기관인 안기부의 위법한 수사가 확인되면서 재심이 시작됐습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해 조사 결과를 통해, 당시 안기부가 김씨를 불법 구금하고 잠을 재우지 않는 등 가혹행위를 했으며 변호인 접견까지 제한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수사관이 원하는 방향으로 진술서를 작성하도록 강요한 정황도 드러났습니다.
 
재심 개시를 결정한 재판부 역시 "변호인 접견을 정당한 이유 없이 불허한 행위는 피고인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것"이라며, 해당 수사 과정이 형사소송법상 재심 사유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수사관들의 행위는 범죄에 해당하지만 공소시효가 완성돼 처벌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재심 요건이 충족된다는 취지입니다.

이 같은 쟁점은 최근 법원이 다시 판단하고 있는 과거 공안사건 재심 흐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간첩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던 재일동포 2세 고 최창일씨 사건과 '통일혁명당 재건' 사건에 연루됐던 고 김태열씨 재심에서 법원은 불법구금과 가혹행위 속에서 이뤄진 수사기관 진술뿐 아니라, 이후 검찰 조사와 법정 진술까지 증거능력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봤습니다.
 
김씨 측은 이를 근거로 "수사기관에서 임의성 없는 자백을 한 피고인이 그 후 검찰 조사나 법정에서도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가 계속되어 동일한 내용의 자백을 하였다면, 이는 위법수집증거에 기초하여 획득된 2차적 증거로서 증거능력이 없습니다"고 말합니다. 위법하게 수집된 1차 증거뿐 아니라, 그 영향을 받은 2차적 증거 역시 배제돼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2026.4.15. 고 김준기씨 측 의견서
(…)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수사관들이 피고인을 불법 구금한 상태에서 작성한 피고인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 피고인이 작성한 진술서 등은 모두 임의성이 없는 상태에서 작성된 것이므로 증거능력이 없습니다. (…) 검사 작성 피의자신문조서 및 원심 법정에서의 피고인 진술 역시 불법적인 수사로 인한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가 계속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반면 검찰은 압수물과 공판조서 등은 적법하게 수집된 만큼 증거능력이 인정된다고 맞서고 있습니다. 특히 1989년 압수수색은 영장에 따라 집행된 것으로 위법수집 증거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재판부는 압수물과 공판조서에 대해서는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있다는 취지를 밝히면서도, 피의자신문조서 등 자백 관련 증거에 대해서는 임의성 여부를 별도로 판단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일부 피의자신문조서는 증거에서 제외되기도 했습니다.
 
▶ 2026.4.22. 피고인 고 김준기 국가보안법 위반 재심 2차 공판
재판부: (…) 압수물과 공판 조서는 (증거) 동의해도 판단에 지장이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원심에서의 법정 진술은 2차적 위법 수집 증거로서 증거 능력 배제해야 된다 이런 주장을 (고 김준기씨 측에서) 하시는 걸로 정리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 말씀드린 대로 해서 피의자 신문 조서를 제외한 나머지 증거들은 증거 채택하는 것으로 정리하겠습니다. (…)
재심은 이제 막 시작 단계입니다. 재판부는 검찰에 이적단체 입증 자료를 요구하며 약 두 달의 준비 기간을 부여했습니다. 다음 공판은 6월 25일에 열립니다. 단체의 성격에 대한 입증과 증거능력 판단이 본격적으로 이어질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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