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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B컷]"구하다 그랬다"는 범인…뽀로로 든 77세 법의학자는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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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서울 마포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자신과 말다툼을 하던 여자친구를 폭행해 숨지게 한 30대 남성. 연합뉴스서울 마포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자신과 말다툼을 하던 여자친구를 폭행해 숨지게 한 30대 남성. 연합뉴스
30대 남성이 여자친구와 다투던 중 수차례 폭행해 숨지게 한 이른바 '마포 폭행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당시 의식을 잃은 여자친구를 끌고 다니던 CCTV 영상이 언론에 공개됐고, 피해자 아버지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숨진 딸의 얼굴까지 공개하는 등 여론의 중심에 섰던 사건입니다.

오늘은 그 사건의 재판 경과를 따라 가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11일 열린 항소심에서 피고인 측에 맞서 열변을 토한 칠순이 넘은 한 원로 법의학자의 이야기, 검사와 변호사의 치열한 법리 싸움이 벌어진 법정에서 의학적 소견으로 좌중을 압도한 그 장면을 전해드리려 합니다.  

여자친구 때려 숨지게 한 남성… 징역 7년에 '항소'

사건은 지난 2020년 7월 25일 새벽에 발생합니다. 연인 관계였던 남자친구 그러니깐 피고인 A씨와 피해자 B씨는 평소에도 크고 작은 다툼이 있었지만, 이날은 A씨가 이별을 통보하면서 물리적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별을 통보한 A씨의 머리채를 B씨가 잡자, 흥분한 A씨는 잔혹한 폭행을 시작합니다. A씨는 오피스텔과 골목길에서 총 4차례의 폭행을 이어갑니다. 1~3차 폭행을 당한 B씨는 4차 폭행이 시작될 즈음 의식을 잃고 쓰러집니다. A씨는 의식을 잃은 B씨의 상체를 잡고서 끌고 다녔고, 뒤늦게 119 신고가 이뤄집니다. 하지만 119가 도착했을 때 B씨는 이미 의식이 없던 상태였고 병원 이송 23일 만에 숨지고 맙니다.

이 사건은 현재 1심 재판 선고가 나온 상황입니다. 1심 재판부는 A씨에게 살인이 아닌 상해치사 혐의를 적용해 징역 7년을 선고했습니다. 검찰도 재판에 넘길 때 A씨의 혐의를 상해치사로 적시했습니다.

잔혹한 폭행으로 사람이 숨졌지만 살인이 아닌 상해치사가 결정된 배경에는 '고의성 여부'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당시 상황을 비춰볼 때 A씨가 처음부터 B씨를 살해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범행했다고 보기 어렵고, 또 폭행 방법 역시 살인 고의가 있지 않았고 판단한 겁니다. B씨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4차 폭행 당시 A씨는 B씨의 머리가 아닌 어깨를 밀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그렇게 상해치사 혐의가 적용돼 징역 7년이 선고됐는데, A씨는 형량이 무겁다며 다시 항소에 나섭니다. B씨의 사인은 자신의 폭행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구조 조치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이유였습니다.

"구하다 머리를 두 번 떨어뜨렸다"… 법의학자는 단호했다

지난 11일 서울고등법원 형사 6-3부(강경표, 원종찬, 정총령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항소심에서 A씨 측 변호인은 재판 초반부터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22.05.11 마포 폭력 사건 항소심 中 피고인 변론
변호인 "뇌출혈이 다른 원인으로 발생했는지 검토했습니다. 구호 조치 과정에서 피해자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충격이 있었는데 (그것이) 원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취지입니다"
피해자의 사인은 척추 동맥 파열로 인한 '뇌 지주막하 출혈'입니다.

A씨 측은 이 사인이 폭행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A씨가 119에 신고하기 위해 의식을 잃은 B씨를 여기저기 옮기는 과정에서 B씨의 머리가 두 차례 땅바닥에 부딪히면서 발생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인이 폭행 과정에서 발생했느냐, 아니면 구호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냐는 형량에 어마어마한 차이를 줄 수밖에 없어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를 검증하기 위해 이날 재판에는 국내 1세대 법의학자이자 학계 권위자인 이정빈 가천대학교 의대 석좌교수(77)가 증인으로 나섰습니다. 파란 재킷을 걸친 이 교수는 두 손 가득 자료를 든 채 이날 법정에 섰습니다.
이정빈 교수. 연합뉴스이정빈 교수. 연합뉴스
이 교수는 단호했습니다. 해당 사인은 구호 조치 과정에서는 발생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 교수는 폭행 과정에서 과신전·과굴절(목이 정상 범위를 넘어 꺾이는 상황)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척추동맥 파열의 뇌 지주막하 출혈이 일어났다고 봤습니다.
22.05.11 마포 폭력 사건 항소심 中 이정빈 교수 증인 신문
검찰 측 "4차 폭행에서 피해자 목에서 과신전, 과굴절이 발생했고 연수(숨골)가 충격받으면서 동시에 척추동맥 파열이 일어났다는 겁니까?"

이정빈 교수 "피해자는 3차 폭행 때까지도 움직였고, 4차 폭행이 시작될 때도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4차 폭행 중에 '푹'하고 벽에 기대서 밑으로 흘러내리 듯이 쓰러졌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인은) 그 직전에 일어났을 것으로 보입니다"
A씨 측은 의식을 잃은 B씨를 구호하는 과정에서 사인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 교수의 소견에 따르면 B씨의 사인은 이미 구호 과정 전에 발생한 겁니다. 그리고 이 교수는 그 시점을 A씨가 B씨의 어깨를 밀치며 때린 '4차 폭행' 당시로 보고 있습니다. 과신전·과굴절은 작은 힘에도 순간적으로 목이 꺾여 발생할 수 있는데, 앞서 이미 3차에 걸쳐 폭행당한 피해자가 4차 폭행 시점엔 저항할 힘조차 없는 무방비 상태였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재판부가 "A씨가 여러차례 B씨를 밀치고 올라타서 폭행하는 장면도 보셨는데, 그 정도 충격으로 척추동맥 손상이 발생할 가능성은 없는가"라고 묻자 이 교수는 앞서 챙겨 온 가방에서 '뽀로로 인형'을 꺼내 들었습니다. 무거운 분위기가 흐르던 법정에 뽀통령 뽀로로가 교보재로 등장하자 재판부와 변호인은 물론 방청객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이 교수는 뽀로로의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상황을 시뮬레이션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칠순이 훌쩍 넘은 교수의 열정 넘치는 설명이 이어지자 재판부는 "이런 설명을 동영상으로 남길까 합니다. 괜찮으십니까"라며 의사를 물었고 이 교수는 "그러세요"라고 답했습니다.이날 재판에 증인으로 나선 이정빈 교수는 뽀로로 인형과 각종 교보재를 활용해 증언을 이어갔다. 송영훈 기자이날 재판에 증인으로 나선 이정빈 교수는 뽀로로 인형과 각종 교보재를 활용해 증언을 이어갔다. 송영훈 기자

"출혈 원인이 명백한데 왜 다른 생각을 해야 합니까?"

피고인 측 변호인들은 이날 재판 내내 다른 행위로 인한 사인 발생 가능성이 없었을지를 밝히는데 주력했습니다.
22.05.11 마포 폭력 사건 항소심 中 이정빈 교수 증인 신문
변호사 "뇌 지주막하 출혈의 경우 대부분은 비(非) 외상성인 뇌동맥류가 문제인데 뇌동맥류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이정빈 교수 "아닙니다. 부검기록을 보면 혈관 파열로 생각되는 소견이라고 돼 있습니다. 부검한 사람이 바보가 아닌 한 뇌동맥류와 외상성 파열을 구분 못할 리가 없습니다"  
변호인의 질문에 이 교수는 다시 교보재를 꺼내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이 교수는 "동맥류 파열 전 사진인데 (부위가) 빵빵해져서 혈관이 굉장히 얇아진다"라며 "저 부분을 잘라서 슬라이드를 만들면 혈관이 없을 정도인데, 이것을 통해 동맥류 파열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부검의는 그렇게 얘기하지 않고, 파열로 생각되는 소견이라고 했다. 동맥류가 아니란 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변호인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되물었습니다. 열정 넘치는 증인이 변호인에게 되묻는 이례적인 상황이 나오자 법정에는 웃음이 쏟아졌습니다. 재판부도 "변호인에게 물어보지는 마세요"라고 가볍게 제지했습니다.

변호인의 신문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22.05.11 마포 폭력 사건 항소심 中 이정빈 교수 증인 신문
변호인 "피고인이 구호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후두부와 두정부를 바닥에 각 1회씩 충격했습니다"

재판부 "증인은 두정부가 아니라 측두부라고 했습니다.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피고인 측은 단순히 순간적으로 피해자가 의식을 상실한 것이고 나중에 후두부와 측두부를 두 번 떨어뜨리는 바람에 뇌 지주막하 출혈이 발생한 것 아닌지 질문한 취지 같습니다"

이정빈 교수 "(사람 머리는) 지주막이 있고, 경막이 있고 그 위에 뼈가 있습니다. (외부에서) 쳐 뼈가 부러지지 않으면 경막하 출혈이 생기고 더 심하면 지주막하 출혈도 옵니다. 그런데 외부에서 쳤는데 지주막하 출혈만 있는 것은 없습니다"
구호 과정에서 머리를 떨어뜨려 외부 충격이 발생했다면 지주막하 출혈과 더불어 경막하 출혈도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22.05.11 마포 폭력 사건 항소심 中 이정빈 교수 증인 신문
변호인 "뇌 지주막하 출혈 원인은 크게 내인성, 자발성, 외인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약 20%는 원인 규명이 안 되는 자발성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인성 원인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해서 바로 외인성 지주막하 출혈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이정빈 교수 "변호사님, 저는 아담과 이브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가 저한테 '누구 아들인지' 묻는다면 저는 아담과 이브의 아들이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출혈의 포커스 된 원인이 있는데 왜 다른 생각을 합니까?"
계속해 다른 가능성을 묻는 변호인의 질문에 이 교수는 위와 같이 답했습니다. 명확하게 보이는 원인이 있는데 왜 계속해 다른 가능성을 물어보느냐는 겁니다.

법리를 앞세워 치열한 싸움이 오가는 법정에서 의학적 전문 지식으로 무장한 그의 답은 매 순간 단호했습니다. 기자가 느끼기에 최소한 이날 법정에서 쏟아진 주요 장면, 그 가운데엔 이 교수가 있었습니다.

1시간 넘게 이어진 이 교수의 증언이 끝나자 재판부는 "장시간 상세히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이 교수는 주섬주섬 뽀로로 인형과 각종 교보재를 가방에 넣고 법정을 나갔습니다. 기자도 이 교수를 따라가 물었습니다. "구호 과정에서 가능성은 전혀 없을까요?"라고 묻자 이 교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습니다. "오늘은 살살 하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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