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있는 을사늑약의 첫 장(오른쪽)과 끝장. 연합뉴스120년 전 오늘 대한제국 멸망을 재촉한 조약에 도장이 찍힌다.
제목도 없이 맺어진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긴다. 바로 1905년 을사늑약이다.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이 일본 허락 없이는 국제적 조약 등을 맺을 수 없게 하고 일본인 통감을 두어 외교 사무를 관리 감독하게 한다는 내용이다.
대한제국이 얻은 것은 하나도 없는 을사늑약은 일제의 겁박 속에 체결됐다. 1905년 11월 17일 경운궁(덕수궁)과 정동 일대에 일본군이 배치됐고 위협적인 대포 소리가 이어졌다. 체결에 반대하던 대신들은 일본군에 의해 끌려 나갔고 이완용 등 일부 대신들은 일대일 협박에 손을 들었다. 결국 18일 새벽 1시가 넘어서야 대한제국 외무대신의 도장이 찍힌다.
조약에 반대하던 고종은 끝내 비준을 거부하고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 조약 체결의 부당성을 알리려 했지만 제국주의 열강 틈바구니에서 패망 군주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연합뉴스
육십갑자가 두 번 돌아 2025년 11월 한미간 관세·안보 협상이 타결됐다.
관세 협상만 놓고 보면 120년 전 을사늑약처럼 한국이 얻을게 하나 없는 협상이다.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 16일 재계 총수와 회동에서 "국제 질서 변경에 따라 불가피하게 우리가 수동적으로 응할 수 밖에 없는 협상이었다"며 "좋은 상황을 만들기 보다는 나쁘지 않은 상황을 만드는게 최선이었다"고 토로했다.
통상 전문가들도 한미간의 관세 협상은 애초부터 한국에게는 '비대칭적 협상'으로 봤다. 한미 양국이 주고 받는 호혜적 협상이 아니라 한국은 주기만 하고 미국은 받기만 하는 기울어진 협상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
결국 한국 정부가 끌어낼 수 있는 협상의 최대치는 줄 것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구체화된 내용이 한미공동설명서 상의 3500억 달러 분납 투자 조항이다.
당초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500억 달러 대미 투자금을 일시금으로 줄 것을 요구했다. 한국 외환보유고의 84%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제2의 외환위기를 불러올 것이 뻔한 무리한 요구에 한국 정부는 버텼고 결국 분납 조항을 이끌어 냈다.
최소한의 안전 장치를 마련했다고는 하지만 3500억 달러는 한국에 여전히 큰 부담이다. 국민의힘 등 범 야권이 국회 비준 동의를 요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헌법상 재정 부담이 큰 조약을 맺을 경우 국회 비준 동의를 얻어야 한다.
야권이 국회 비준 동의를 주장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은 '조약이 아니다'는 이유로 비준 동의에 반대하고 있다.
여야의 입장 모두 일리가 있다.
다만 국회 비준 동의 시 한국에 불리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부 통상 전문가들은 국회 비준 동의가 발목을 스스로 잡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비준 동의를 하면 협상 내용을 변경할 수 없어 미국의 정권 교체 등 변수에 따라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협상 내용을 바꿀 수 없다는 지적이다.
국회 비준 동의 대신 민주당이 의원 입법 형태로 제출할 대미투자특별법을 꼼꼼히 따지면 된다. 정부 여당도 특별법 국회 심의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은 2년 뒤 정미7조약으로 일본에 군사권을 뺏기고 1910년 끝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속수무책의 무기력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진영이 아닌 국익을 우선으로 하는 지혜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