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얼굴' 임영규/임동환 역 배우 박정민.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스포일러 주의 매 작품 다른 얼굴을 선보이며 사람들을 기대하게 만드는 배우 박정민이 영화 '얼굴'에서 1인 2역이자 2인 1역이라는 독특한 얼굴을 드러냈다. 박정민이 연기한 아버지 임영규의 젊은 시절과 아들 임동환을 두고 연상호 감독은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했다고 극찬했다.
시각장애를 가졌지만 도장을 파며 성실히 살아가는 소시민 젊은 임영규는 모두에게 외면당하던 중 '글씨가 참 아름답다'며 처음으로 말을 걸어 준 정영희에게 마음을 열고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아들 임동환을 얻는다. 아내 정영희의 얼굴 한 번 못 보는 게 임영규의 한이다.
그의 아들 임동환은 앞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보필하며 공방인 청풍전각의 소장을 맡고 있다. 40년 전 집을 나간 줄로만 알고 있던 어머니의 백골 시신이 야산에서 발견되자,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의 얼굴과 그에 얽힌 죽음의 진실을 좇는다.
박정민은 자신이 연기한 젊은 임영규와 아들 임동환에 관해서 "연결되어 있는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어떤 점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연결됐다고 했으며, 그가 본 젊은 임영규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영화 '얼굴'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재밌게 연기한 두 얼굴
박정민은 임영규라는 특정 인물을 자신과 권해효가 연기하는 동시에 자신이 젊은 임영규와 아들 임동환을 연기하는 '얼굴'을 통해 "독특한 감정을 전달할 수 있겠다"고 예상했다.
연상호 감독에게 처음 임동환 역할을 제안받은 후 원작 만화를 다시 읽었다. 그 후 아들 역할보다 젊은 아버지 역할에 더 끌렸다. 그래서 연상호 감독에게 젊은 아버지 역할로 캐스팅된 거냐고 물어봤고, 내심 1인 2역을 생각하고 있던 연 감독은 냉큼 젊은 임영규와 임동환을 연기해 줄 것은 제안했다.
박정민은 "아버지와 아들은 따로 떼어놓고는 설명이 안 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지점에서 1인 2역을 해냈을 때 흥미롭겠다고 봤다"며 "연기하면서 재밌었다"고 말했다.
영화 '얼굴'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평소 박정민이 연기할 때 염두에 두는 건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 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너무 과장된 인물을 만드는 걸 지양하는 편"이라고 말한 박정민이 젊은 임영규를 연기할 때는 이 같은 기조와 반대로 연기했다. 그런 지점이 재밌었다.
박정민이 본 젊은 임영규는 아무리 수모를 당해도 웃고, 잘 보이려 하고,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게 이뤄질 때까지는 자신을 감추고 사는 사람이었다. 아내 정영희와의 일까지 있고 나서는 내면이 엄청나게 기괴하게 비틀어졌을 인물이었다. 이러한 캐릭터의 특성을 평소보다는 조금 더 극화해 표현했다.
"젊은 영규를 만들 때는 해보고 싶은 대로 해보고, 거기서 발견되는 게 있으면 조금 더 극대화해 봤어요. 원작이 만화기도 하고, 자기 자신의 표정이기에 그 사람 기억 속에 있는 거라면 좀 극대화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죠. 어떤 때는 그냥 했는데 만화 같은 표정이 나오기도 했어요. 그런 걸 발견하는 재미도 있었어요."
영화 '얼굴'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정영희의 장례식, 임영규의 고백
박정민은 연상호 감독의 울타리 안에서 '얼굴'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만난 배우들과 호흡하며 여러 가지 인상 깊은 순간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정영희의 장례식 장면이다. 박정민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장례식 장면인데, 그 장면을 찍고 영화에 대한 애정과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자신이 연기할 신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촬영에 들어가는 박정민에게 그 신은 자신의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박정민은 "배우들이 그 자리에서 만든 장면이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일인데 더 좋게 흘러갔다"며 "토론토영화제에서도 그 신의 반응이 좋았다"고 이야기했다.
영화 '얼굴'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또 다른 장면은 진실을 알게 된 아들 임동환과 아버지 임영규가 감정이 격해져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당시를 두고 박정민은 "권해효 선배님의 연기가 너무 압도적"이었다고 떠올렸다.
그는 "그때 거기 있는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했다. 15분을 혼자 연기하시면서 대본에 없던 대사로 임영규의 전사도 만들었다"며 "선배님이 너무 압도적인 연기를 보여주셔서 현장에서 완패한 느낌이었다. 많은 관객이 권해효 선배님의 연기를 보고 감탄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15분 동안 내가 할 게 뭐 있었겠나. 이렇게도 해봤다가 저렇게도 해봤다가 일정 부분만 다시 찍기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 신이 제일 어려웠다"며 "누군가 내가 리액션했다는 걸 알아준다면 감사할 거 같다"며 웃었다.
영화 '얼굴' 임영규/임동환 역 배우 박정민.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연상호의 세계라서
'얼굴'이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는 소수 정예의 배우, 스태프와 일반 장편 영화 대비 4분의 1에 불과한 촬영 기간으로 완성된 영화라는 점이다. 20여 명의 스태프이 2주의 프리 프로덕션을 거쳐 약 3주간 13회차 촬영을 통해 나온 결과물이 '얼굴'이다. 박정민은 노 개런티로 출연하는 대신 러닝 개런티(출연료 외에 흥행 결과에 따라 추가로 지급받는 보수)를 받기로 했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박정민은 '동주'를 떠올렸다. 예산이 적은 영화라 카메라 화각을 넓힐 수 없는 만큼 배우의 얼굴에 집중할 수밖에 없고, 배우들은 연기에 더욱 혼신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테이크가 한정적이다 보니, 웬만하면 두 테이크 안에 끝내야 했기에 오히려 더 준비하고 더 절치부심해서 가야 했죠. 그런 긴장감 있는 분위기도 재밌었어요. 그리고 사실 전 제 얼굴 보는 걸 힘들어하는데, 이번 영화는 모니터하면서 연기가 별로라서 다음 테이크에서 고쳐야겠다는 것보다는 괜찮은데 다른 걸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 과정이 재밌었어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도 그랬을 거 같아요." 박정민은 이런 제작 시스템도 연상호 감독이기에 가능했을 거라고 했다. 연 감독을 좋아하고, 그의 이야기에 동의했기에 스태프와 배우들이 기꺼이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는 '염력' 이후 연상호 감독에게 반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굉장히 유머러스한데 숨어 있는 날카로운 시선들, 그게 굉장히 좋았다. '염력' '지옥' '얼굴'을 좋아하는데, 내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과 굉장히 비슷한 작품들"이라며 "많은 관객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시선이 좋아서 그런 작품을 주면 안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영화 '얼굴'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얼굴'의 경우 '성과주의'에 관한 이야기가 제일 처음 와닿았다. 박정민은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까지 할 수 있느냐고 한다면, 임영규라는 개인이 사실상 대한민국이란 사회를 대변하는 인물"이라며 "1970년대 성과를 위해 내달렸던 대한민국을 극대화한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처음 감독님과 '얼굴'을 이야기할 때 가장 끌렸던 부분이 그 지점"이라며 "감독님께서도 자신이 성과주의적인 인물이라서 그런 지점을 되돌아보면서 쓴 대사들이고 그린 그림이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그래서 전 이 작품을 적은 예산으로 만든 가장 큰 이유가 감독님께서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이야기를 그 어떤 구애도 받고 싶지 않아서라고 생각해요. 자본의 논리로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고스란히 임영규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는 거죠." 연상호 감독의 시선이 좋고, 그런 시선을 담은 작품이 좋다고 말한 박정민 역시 창작자로서 "숨겨져 있지만, 충분히 해야 하는 이야기, 애써 해야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제가 뉴스 기사를 스크랩해 놓는 습관이 있는데, 보다 보면 언론사에서 충분히 취재하고 알리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얻지 못하는 이야기가 너무 많더라고요. 만약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그중 관심 있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어렴풋하게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