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화 '콘클라베' 스틸컷. ㈜디스테이션 제공때로 영화의 러닝타임은 영화관을 나선 후에도 이어집니다. 때로 영화는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비로소 시작합니다. '영화관'은 영화 속 여러 의미와 메시지를 톺아보고, 영화관을 나선 관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스포일러 주의 가장 경건하고 성스러운 장소에서 가장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드러내는 욕망과 정치적 암투가 가고자 하는 길 끝에 있는 건 가장 종교적인 질문이다. 폐쇄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콘클라베'는 보수화된 교회를 향해 경건하면서도 긴장감 넘치게 개혁을 말한다.
교황의 예기치 못한 죽음 이후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시작되고, 로렌스(랄프 파인즈)는 단장으로서 선거를 총괄하게 된다. 한편 당선에 유력했던 후보들이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교활한 음모와 탐욕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
라틴어로 '콘 클라비스'(Con clavis, 열쇠로 문을 잠근 방)를 의미하는 '콘클라베'(Conclave)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 제도로, 교황 선종 시 선거권을 가진 추기경단이 소집되어 교황을 선출하는 비밀회의를 이른다. 선거가 진행되는 시스티나 성당은 선거 기간 동안 폐쇄되며, 추기경단은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채 교황 선출을 위한 투표를 진행한다.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콘클라베'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2022)로 시상식을 휩쓸며 연출력을 인정받은 에드워드 버거 감독과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피터 스트로갠이 각색에 참여하며 교회의 빛과 그림자를 깊이 있게 그려냈다.
외화 '콘클라베' 스틸컷. ㈜디스테이션 제공신성한 가톨릭에도 '교황'이라는 이름에 대한 욕망은 존재한다. '콘클라베'는 그 욕망의 중심에서 마치 정치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스캔들과 부패, 음모와 모함이 맞부딪히는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콘클라베'를 관람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키워드는 '의구심' 또는 '의심'이다. 영화는 의구심을 갖고 교황 선출 제도인 콘클라베를 바라보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영화 속 인물들의 의심은 자연스럽게 관객의 의심이 된다. 이는 주인공 로렌스와 함께 콘클라베에 참여하며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각자 질문하고 답을 찾아보자는 제안이다.
영화 내내 이어지는 의심은 과연 신이란 무엇이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종교란 무엇이며 믿음이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확신을 경계하고 의심하는 과정은 관객들이 안도한 순간에도 느닷없이 찾아온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가 다다르고자 한 메시지와 각자의 질문의 실마리를 건지게 된다.
영화 안, 즉 콘클라베 안에서 '의심'은 결국 "신념을 잃은 건 교회"였다는 말로 설명된다. 가장 성스러운 장소에 모인 가장 순수하고 신실한 믿음의 정점에 서 있을 것으로 보이는 추기경들은 교황 자리를 두고 정치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속된 욕망과 가장 멀 것 같은 이들의 민낯을 바라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의심'이 피어난다.
그러나 이 의구심은 가톨릭 그 자체 혹은 신에 대한 의구심이라기보다 교황의 말마따나 신념을 잃은 교회, 신에게서 멀어진 믿음, 신이 아닌 인간의 욕망으로 교황을 선출하고자 하는 추기경들에 대한 의구심이다.
외화 '콘클라베' 스틸컷. ㈜디스테이션 제공겉으로 드러난 욕망이냐 감춰진 욕망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콘클라베에서 만날 수 있는 건 권력과 이를 움켜쥐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선과 악, 종교인과 일반인이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교황 선출은 "주님께서 정할 일"이라고 겉으로는 말하지만, 뒤에서는 각자의 세력을 결집하고, 다른 후보를 경쟁에서 몰아내려 하고, 자신만이 교회를 부흥할 혹은 몰락을 막을 유일한 대안이라 믿는다.
실수라 부를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도, 주님의 계시를 받았다거나 교황의 뜻이었다는 핑계로 어떻게든 교황의 자리에 앉고자 하는 모습은 앞서 교황이나 로렌스 추기경이 말했던 '의심'을 갖게 만든다.
이렇게만 보면 영화가 반종교적인 것 같지만, 의심의 끝에 다다르기까지 영화는 사실 굉장히 종교적인 방식을 취한다. 교회의 보수성의 민낯을 드러내면서도, 가톨릭이라는 근본을 흔드는 게 아니라 가장 가톨릭적인 방식으로 곪아버린 보수성과 부패에 맞서 새 시대를 열기 위한 개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새 교황의 선출 과정과 선출된 후 펼쳐지는 반전은 그야말로 가톨릭의 본질이다. 동시에 '콘클라베'가 '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성을 얼마나 잘 파악하고 있는지, 그리고 장르의 미덕을 잊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콘클라베'는 여러모로 폐쇄적인 가톨릭을 열어보고자 하는 이들의 소망이 담겼고, 그렇기에 '개방'의 이미지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마지막이 될 것으로 생각한 투표를 진행하던 중, 창문을 폐쇄한 장치가 폭탄 테러로 깨지며 폐쇄적인 콘클라베가 물리적인 의미에서 개방된다. 콘클라베의 전통이 깨진 것이다. 새 교황이 선출된 마지막 투표 과정에서 개방된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 바람, 새소리는 가톨릭교회의 폐쇄성, 보수성이 깨어지고 새 교황과 함께 새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외화 '콘클라베' 스틸컷. ㈜디스테이션 제공개혁에는 저마다의 슬로건이 존재한다. '콘클라베'에서는 이를 '이름'으로 드러낸다. 새 교황으로 선출된 베니테스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길 원하느냐는 질문에 무결하다는 어원을 지닌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라고 말하는 장면은 전통 보수파와 개혁 진보파 사이 갈등에서 사라졌던 신앙과 순수한 믿음을 회복하겠다는 선언이다. 이 이름을 선택한 베니테스 추기경은 다른 어느 교황 후보보다도 신실하고 순수한 믿음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이는 베니테스 이전 그 이름을 지녔던 교황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중세 교회 최전성기의 교황이며, 인노켄티우스 4세 역시 중세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이름을 남겼다. 베니테스가 걸어갈 미래 속 교회가 어떤 모습일지 암시한다.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인물이 있다면, 이를 받아들이고 함께해 나갈 인물 역시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거북이와 수녀들의 모습 역시 눈여겨봐야 한다.
거북이는 땅과 물속 양쪽을 오가는 동물이자, 변화와 전환의 상징이다. 전 교황이 아끼던 거북이를 구경하는 베니테스와 만난 로렌스의 모습, 베니테스가 새 교황으로 선출된 후 연못(혹은 분수)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는 걸 본 로렌스는 거북이를 물속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이 등장한다. 거북이라는 변화와 전환이 가리키는 베니테스가 앞으로 새 시대를 열 것이고, 로렌스도 베니테스의 비밀을 가슴에 묻은 채 이를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상징은 '수녀'다. 베니테스의 길을 받아들인 로렌스가 영화의 엔딩에서 로렌스 추기경이 창밖을 바라볼 때, 문을 열고 나온 수녀들이 폐쇄된 공간에서 벗어나 사제들이 다녔던 열린 공간으로 나온다.
앞서 의중 결정 추기경(in pectore, 교황이 대외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의중으로 임명한 추기경)으로 가장 늦게 콘클라베에 참여하게 된 베니테스는 식사 자리에 처음 등장해 기도하면서 수녀들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다. 이때 카메라는 아녜스 수녀가 베니테스를 보며 작게 미소 짓는 장면을 클로즈업한다. 이는 영화의 중요한 단서이자, 결말에 이르러 다시 돌아본다면 꽤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외화 '콘클라베' 스틸컷. ㈜디스테이션 제공과거에도, 지금도 교회를 향해 변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영화는 콘클라베에서도 추기경들의 뒷바라지 하는 존재였던 수녀들이 사제들의 영역으로 발걸음을 내딛을 것임을, 그들이 열고 나온 문이 닫히며 구시대가 끝나고 새 시대가 열릴 것임을 암시하며 끝난다. 영화가 베니테스의 입을 빌려 말했던 그 가치를 엔딩으로 다시금 보여주며 확고하게 주장한 셈이다.
'콘클라베'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인 로렌스 추기경, 벨리니 추기경, 트랑블레 추기경, 아녜스 수녀, 베니테스 추기경을 연기한 랄프 파인즈, 스탠리 투치, 존 리스고, 이사벨라 로셀리니, 카를로스 디에즈는 열연을 통해 관객들을 매혹적인 스릴러의 세계로 초대한다. 특히 랄프 파인즈는 자신의 이름에 거는 관객들의 기대를 완벽하게 충족시켜 줬다.
120분 상영, 3월 5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외화 '콘클라베' 메인 포스터. ㈜디스테이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