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빼미' 인조 역 배우 유해진. NEW 제공※ 스포일러 주의 "왕도 하고 참…." 이렇게 말하며 피식피식 웃는 모습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익숙하게 봐왔던 배우 유해진 그대로다. 많은 사람이 '유해진' 하면 구수함, 친근함, 수더분함 등의 단어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런 유해진이 영화 '올빼미'를 통해 상반된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왕의 남자' '전우치' '부당거래' '타짜-신의 손' '베테랑' '럭키' '공조' '택시운전사' '봉오동 전투' '승리호' 등 장르를 넘나들며 다수의 작품에 출연하며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유해진은 '올빼미'에서 연기 인생 최초로 왕 역할을 맡았다.
유해진은 청에 인질로 끌려갔던 아들 소현세자가 8년 만에 돌아오자 정체 모를 불안감에 휩싸이며 아들과 갈등을 빚는 모습으로 시작해 불안감과 광기가 폭주하며 변모하는 모습을 스크린에 완벽하게 그려냈다. 유해진은 인터뷰 중에도 "진짜로 웃긴 거 같다"며 웃음 지었다.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유해진은 영화 속 모습과 상반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모습으로 나타나 인조를 연기한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려줬다.
영화 '올빼미' 스틸컷. NEW 제공 "내가 왕을 하다니…"…25년 연기 인생에서 처음 마주한 왕 역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진짜로 웃긴 것 같아요. 내가 왕을 하다니…. 개인적으로 가만히 있을 때도 그런 생각을 해보면 피식피식 웃게 돼요. 왕도 하고 참…."(웃음) 배우 인생 처음으로 유해진이 연기한 왕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강력한 군주로서 카리스마를 지닌 왕이 아니다.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라 두 번의 호란을 겪고, 결국 청 태종 앞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 번 절하고 그때마다 세 번씩, 모두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방식)의 항복식을 치르는 이른바 '삼전도 치욕'의 주인공인 조선 16대 인조다.
호란의 트라우마와 수치심 등으로 뒤범벅된 내면을 가진 왕,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왕, 유해진이 연기한 왕은 복잡한 내면을 지닌 인물이었다. 물론 진지한 역할도 자주 연기했지만, 극단의 어둠을 연기한 유해진은 낯설면서도 잘 어울렸다.
유해진은 "처음 왕 역할이 들어왔을 때도 그냥 '할게'라고 했지만, 하고 나서 두려웠다"며 "한다고는 했는데, 관객들이 갖고 있는 나의 친숙한 모습이 있으니까 (그런 나를) 못 받아들이고 이야기에 들어오지 못하면 어떡하나, 내가 장애가 되면 어떡하나, 그 생각을 했다"고 이야기했다.
영화 안에서 왕인 인조의 모습을 봐야 하는데 사람들이 '친숙한 유해진'을 보게 될 것이 가장 큰 고민 중 하나였다. 그는 "어제 기자시사를 보는데 픽픽 웃는 분들이 안 계셔서 다행이다 싶었다"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영화 '올빼미' 스틸컷. NEW 제공자신의 고민과 과제를 해결할 방법은 그저 배역에 충실한 것밖에는 없었다. 유해진은 "나한테 최면을 걸고 믿고, 신에 충실하려고 했다. 그것밖에 답이 없었다"고 말했다. 여기에 유해진은 자신의 등장이 관객들에게 어색하게 다가가지 않도록 감독에게 첫 등장 장면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했다.
"사실 첫 등장이 영화 속 등장이 아니었어요. 짠 나타나는 등장이었는데, 그러면 부작용이 있을 거 같았죠. 그래서 조금 시간을 벌어보자, 그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관객에게 준비할 시간을 드리기로 했죠. 그래야 할 것 같았어요. 그래야 '아, 유해진이 왕이라고 했지' '음, 저런 모습이구나'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저한테 필요했어요." 역사 속 실존 인물이지만 그는 인조를 영화 안에서 존재하는 독립된 인물로 봤다. 그리고 딱 그것만큼만 표현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유해진은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스릴러이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연기가 필요했고, 딱 시나리오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 더 많이 알 필요도 없었다"며 인물에게 접근해 간 과정을 설명했다.
또 그는 "'이럴 땐 이렇게 하고 있었겠지?' '이때는 꼭 이렇게 했을까'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 같은데' 등의 질문에서 틀을 깬 왕의 모습이 출발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유해진은 자신과 이야기의 힘을 믿으며 차근차근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자신만의 인조를 만들어 나갔다.
영화 '올빼미' 인조 역 배우 유해진. NEW 제공 유해진이 '올빼미'에서 만난 다양하고 재밌는 인연
유해진은 "곤룡포를 입고 있으니 진짜 행동이 조심스러워지고, 약간 뭐가 된 느낌은 있었다. 진짜 그런 건 있더라"며 촬영 당시를 회상했다. '올빼미'는 유해진에게 필모그래피에 '첫 왕 역할'을 더한 것 외에도 재밌는 인연을 가져다준 작품이다.
지난 2005년 '왕의 남자'에서 광대 육갑 역을 연기했던 유해진은 이번 영화를 왕을 연기했고, 당시 조감독이었던 안태진 감독을 연출자로 다시 만났다.
유해진은 "'왕의 남자'와 똑같은 부안 세트장에서 촬영했는데, 가서 보는데 정말로 '왕의 남자' 할 때가 많이 생각났다. 내가 저 돌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는데 이제는 위에서 보고 있구나"라며 웃은 뒤 "나한테는 '왕의 남자'가 좋은 작품으로 남아있다. 거기서 또 찍으니 기분이 좋더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조감독에서 감독으로 재회한 안태진 감독에 관해 "되게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그걸 또 영화에 잘 녹이는 섬세함도 있다"며 "그리고 완성된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건데 '저게 저렇게 쓰려고 그걸 찍었구나' 싶은 장면이 꽤 많이 있었다. 되게 똑똑한 것 같다"고 말했다.
감독과 함께했던 촬영 현장을 이야기하던 유해진은 현장에서 함께한 또 다른 동료인 배우들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주맹증(밝은 곳에서의 시력이 어두운 곳에서보다 떨어지는 증상)을 갖고 있는 맹인 침술사 경수를 연기한 류준열을 두고 "맹인 역할을 하면서 이야기를 힘 있게 끌고 가는 모습을 보며 나무가 되게 두꺼워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유해진이 극찬한 또 다른 배우는 바로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소현세자 역의 김성철이다. 유해진은 "와~"라는 감탄사를 내뱉은 뒤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평범한 말을 어떻게 저렇게 잘 살려서 하지?'라고 생각했다"며 "사실 쑥 지나갈 수 있는 그런 말을 보는 사람 입장에서 크게 느낀다는 게 참 쉽지 않다. 되게 매력적이었다"고 말했다.
영화 '올빼미' 인조 역 배우 유해진. NEW 제공 유해진이 돌아온 배우의 길 "잘 걸어왔구나"
'올빼미'를 찍으면서 유해진은 특정 신에서는 연극 무대에 오른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영화 자체가 이야기나 표현 방식은 물론 감정선이 굵직하기에 무대를 떠올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해진은 "당시는 힘들었지만, 연극을 했던 게 나의 큰 자산이 되어 있구나 생각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연기를 옷으로 비유했을 때, 배우로서 "뭐든지 입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해진이 배우의 길을 걷는 데 자양분이 되어 준 연극을 시작으로 25년의 연기 인생에서 그는 다양한 옷을 입었다.
"부안에서 촬영하면서 느꼈던 건데, 17~8년 전에 부안에서 '왕의 남자'를 찍었는데 또 여기 와서 이렇게 서 있다는 생각했어요. 그 시간이 쭉 흘렀을 거 아니에요. 여기 서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죠. 관광객으로 서 있는 게 아니라 배우로서 서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잘 걸어왔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영화 '올빼미' 스틸컷. NEW 제공25년 만에 곤룡포까지 입은 유해진에게 기대하는 옷이 있는지,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난 그런 게 없는 거 같다. 어떤 이야기 하고 싶냐 그런 것도 별로 없는 거 같고, 그냥 이렇게 기다리는 거 같다. 어떤 좋은 작품일지, 어떤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면으로든 가치가 있는 작품이 왔으면 좋겠다"고 그다운 답을 내놨다.
마지막으로 유해진은 관객들이 '올빼미'를 재밌게만 봤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을 전했다. 어떤 영화든지 극장에 온 관객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거다.
"재밌게 보면 행복한 거죠. 도피처가 됐든, 해피 플레이스가 됐든 극장에 와 있는 동안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려고 극장을 찾는 거잖아요. '올빼미'가 이에 충족이 되는 영화였으면 해요. 일단 신선한 설정이 좋고,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도 되게 쫄깃한 맛이 있는 스릴러니까, 극장에 와서 보면 재밌을 거 같습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