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스틸컷.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스포일러 주의 와칸다의 왕 티찰라이자 와칸다의 수호자 블랙 팬서, 그리고 마블 첫 흑인 히어로를 연기한 채드윅 보스만이 지난 2020년 세상을 떠났다. '블랙 팬서'의 상징적인 인물의 부재라는 상황에 놓인 마블이 선택한 건 새 티찰라를 연기할 배우가 아닌 그에 대한 헌사이자 애도였다.
과연 마블과 와칸다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에서 티찰라와 보스만을 어떻게 떠나보냈는지, 그리고 새로운 왕을 어떻게 등장시켰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이번엔 잠시 자리를 비운 마블 덕후 P 대신 모 매체 엔터팀 기자이자 물멍(물을 바라보거나 물소리를 들으며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있는 일) 덕후인 H가 함께했다. [편집자 주]외화 '블랙 팬서' 스틸컷.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블랙 팬서이자 와칸다의 왕이었던 고 채드윅 보스만에 대한 애도
최영주 기자(이하 최) : 채드윅 보스만이 세상을 떠난 후 마블은 그를 대신할 배우를 섭외하거나 그를 CG로 등장시키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단언했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이하 '블랙 팬서 2')를 통해 보스만의 뜻을 이어가겠다고 밝혔고, 이번 영화는 채드윅 보스만에 대한 헌사 그 자체였다. 먼저 '블랙 팬서 2'를 어떻게 봤는지 궁금하다.
물멍 덕후 H 기자(이하 H) : 상영 시간이 161분으로 긴 편이라 보는 중간 지겹지 않을지 지레 걱정했었는데, 예상보다 몰입감 유지가 어렵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임 블랙 팬서에 대한 애도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바다와 대교 등에서 이뤄진 전투 신, 수중제국 탈로칸과 네이머(테노치 우에르타 메히아), 리리 윌리엄스(도미니크 손) 등 새 캐릭터 소개를 알차게 담았더라.
채드윅 보스만의 비보가 있기 전에 후속편 제작이 확정됐었고, 그의 죽음 뒤 시나리오를 수정했다고 알고 있다. 새로운 블랙 팬서를 탄생시켜야 하는 미션이 포함되면서 상영 시간은 어쩔 수 없이 길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루즈해지는 장면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여기서 더 덜어냈으면 흐름이 뚝뚝 끊겨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최 : 실제 배우의 죽음을 영화 안으로 갖고 와 티찰라의 죽음으로 연결했다. 폴 워커의 죽음 이후 '분노의 질주' 시리즈가 작품 안에서 그를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로 설정한 것과 달리 '블랙 팬서' 시리즈는 그가 티찰라 왕이라는 캐릭터로서도 안식을 맞이하게끔 했다. 이러한 영화적인 방식의 애도는 어떻게 봤나?
H : 마블 시리즈에서 '블랙 팬서 1'이 차지하는 의미, 채드윅 보스만의 기여, 배우 및 캐릭터와 팬들이 쌓은 라포를 고려했을 때 티찰라 캐릭터를 다른 배우로 대체하지 않은 결정은 상업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대놓고' 배우와 캐릭터를 함께 애도하는 방식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놓고'라는 표현이 좀 애매할 텐데, 2편 스토리를 이끄는 핵심 키워드로 스토리텔링의 원동력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외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스틸컷.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최 :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시작한 티찰라의 죽음과 장례는 보는 입장에서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무너뜨릴 정도로 그의 죽음을 영화 안으로 깊숙이 가져왔다. 상실과 극복의 과정이 영화 전반을 지배하면서 '블랙 팬서 2'는 한 편의 '애가'(哀歌)가 됐다.
H : '히어로 무비가 애도로만 가득 찰 수 있나?'라는 전제 혹은 편견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배우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자막 몇 줄로, 캐릭터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다른 캐릭터의 성장 서사를 위한 작은 장치 정도로 소비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이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채드윅 보스만의 역할을 누가, 어떻게 채울 수 있겠어?'라는 냉소적 물음에 대한 현명한 답이었다. '채울 필요 없어. 우리는 그의 상실을 직시하겠다'라는 선언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빈자리를 비어 있도록 놔두는 것'을 영화적인 방식으로, 더 능동적으로 보여줬다.
그런 영화적 시도가 영화 오프닝 때 티찰라의 장례식 시퀀스 다음 마블 스튜디오 로고를 채드윅 보스만의 티찰라로 가득 채웠을 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이어지는 게 좋았다. 관객 역시 영화 속 인물들처럼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이기에 구경꾼 위치보다는 동료처럼 느끼도록 만들기도 했다.
'엔드게임'을 본 뒤 팬들에게는 나타샤나 아이언맨이 나오는 영화는 복습 자체가 쉽지 않은데('블랙 위도우'도 관람 자체가 캐릭터에 대한 애도 느낌이었지만, 보는 내내 괴로웠다), '와칸다 포에버'는 복습을 가능하게 한다.
외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슈리 캐릭터 포스터.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티찰라의 뒤를 이은 새로운 블랙 팬서 슈리의 성장
최 : 티찰라의 뒤를 이어 결국 슈리(레티티아 라이트)가 새로운 와칸다의 왕이자 새로운 블랙 팬서가 된다. 이 과정에서 슈리는 오빠 티찰라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를 떠나보내기도 전에 라몬다 여왕(안젤라 바셋)마저 죽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분노에 휩싸인다. 슈리를 성장시키기 위해 상실을 안겼는데, 영화가 새로운 왕을 맞이하는 방식은 어떻게 봤나?
H : 코믹스를 직접 보진 않았는데, 코믹스에서는 슈리가 무술에도 능하고 티찰라를 대신해 블랙 팬서를 맡기도 했었다고 알고 있다. 티찰라를 질투하기도 하고. 그동안 마블 안에서 슈리 캐릭터 빌드업은 히어로들을 보조하는 과학자 정도에 그쳤으니, 슈리가 새 블랙 팬서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걸 알면서도 '과연 어떻게?'라는 게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최 : 지능형 캐릭터에 신체적 능력까지 더해지니 마치 아이언맨 같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슈리에 초점을 맞춰 본다면, 히어로물보다는 아직은 미숙한 어른인 슈리의 성장기에 가까웠다.
외화 '블랙 팬서' 스틸컷.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H : '와칸다 포에버'에서 슈리는 그동안 자기 안에서 충돌해온 과학자 정체성과 와칸다인(왕족) 정체성 문제에 대해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내가 누구인지' 인식하고 보여줘야 하는 상황이다. 2편에서 슈리는 와칸다의 수석 과학자 자리에 있긴 했지만, 와칸다의 전통을 '미신'이라고 생각했던 게 확실해진다.
티찰라의 죽음 뒤 어머니는 슈리에게 심장 모양 허브 개발에 힘쓰라고 하지만, 슈리는 다른 기술 개발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물론 허브 개발을 자꾸 미뤘던 건 그리운 오빠를 상기해야 하는 상황이 괴로웠던 점도 작용한 건 맞고, 전통에 대한 의구심만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불안감 내지 의구심도 깔려있었다고 봤다. '내가 블랙 팬서를 이어 할 수 있을까?' 같은.
최 : 맞다. 그렇기에 슈리가 심장 모양 허브를 마신 뒤 만나는 인물이 중요했다. 누구의 유산을 이어받을지, 즉 슈리의 내면이 드러나는 부분이었으니 말이다.
H : 슈리가 만난 건 킬몽거였다. 슈리가 킬몽거를 만난 건 두 가지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슈리도 킬몽거가 허브를 마셨을 때처럼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 찬 위험한 상태라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신념의 부족). 와칸다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어머니나 오빠를 한 번만 더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우선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개인적으로 슈리의 흑화와 폭주(?)가 재밌었다. 티찰라는 "왕이 되기엔 너무 착한" 존재로서 그려졌지만, 슈리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매력을 제대로 보여줬다. 블랙 팬서 슈트를 선택할 때도 티찰라는 자신의 취향보다 적에게 덜 눈에 띌 슈트를 선택하지만, 슈리는 분명 자신의 취향대로 골랐다. 오빠가 '멘토'로 붙여준(?) 음바쿠(윈스턴 듀크)를 제압하는 장면도 좋았고.
최 : 고결하고 어른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한 티찰라와 달리 슈리는 아직 많은 감정과 가능성을 품은 성장 중인 인물이다. 그렇기에 지금 어떤 인물을 만나 어떤 영향을 받고 어떤 길을 선택할지가 중요한 것 같다. 사실 불안정함이라고 할까, 이런 모습이 오히려 더 좋긴 했다.
외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스틸컷.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H : 그런데 마지막에 슈리가 어머니를 아주 잠깐 만나고 네이머를 살려주는 선택이 좀 느슨한 봉합처럼 여겨졌다. 아주 개연성이 떨어지는 건 아니면서도 그 직전까지 폭주했던 모습에 견줘서는 조금 맥 빠지는 결말이었달까. 그나마 후반부에 슈리가 리리에게 소중한 자동차를 다시 만들어준 걸 보면서 슈리의 원래 인성이 다정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겨지긴 했다.
최 : 네이머가 전편의 고민이자 티찰라의 고민을 담은 인물이자 동시에 슈리와 거울처럼 서로 마주하고 서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슈리가 네이머를 죽일지 살릴지 고민하는 장면에서 슈리의 상황과 네이머의 상황을 교차편집해 보여줬다. 그러면서 둘 사이 연결성도 강조됐는데, 앞으로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하다.
H : 영화에서 슈리 캐릭터는 기존에 로키, 킬몽거처럼 적통 아닌 차남 재질이라서 새 히어로로서의 빌드업이 쉽지 않았던 것도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덕분에 슈리의 흑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2편에서 슈리는 과학자 정체성과 와칸다 왕족 정체성을 공존가능하게 재정립하면서 히어로로 무사히 성장했다.
최 : 동의한다. 마블 페이즈 4에 들어서면서 새롭게 등장한 젊은 히어로들은 첫 영화에서 자신의 트라우마나 슬픔을 극복하고 한 발 내딛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연장선상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상실을 마주하고, 소중한 이들을 떠나보낸 슈리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하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