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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업]"아빠, 내가 죽어도 세월호처럼 욕할거에요?" 故 장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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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1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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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장덕준과 故 김용균 어머니의 만남
전태일 50주기,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나
일하는 현장 보고픈데.."은폐와 물청소뿐"
아버지를 반성하게 했던 아들의 말
"아빠,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중대재해법, 제정과 이행점검 모두 중요

■ 방송 : CBS 라디오 <김종대의 뉴스업=""> FM 98.1 (18:25~20:00)
■ 진행 : 김종대 (연세대 객원교수)
■ 대담 : 김미숙 이사장 (김용균재단). 박미숙 씨 (쿠팡 물류센터 노동자 故 장덕준 씨 어머니)



◇ 김종대> 50년 전 전태일 열사의 숭고한 희생이 사회 변화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의 꿈을 위해 노동 현장 곳곳을 누비면서 활동한 고 이소선 여사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곁에도 제2의 이소선 여사가 계십니다. 바로 고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씨죠. 작년에 사단법인 김용균재단을 출범하고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오늘 전태일 50주기를 맞아 업터뷰 시간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 김미숙> 안녕하세요.

◇ 김종대> 귀한 걸음 해 주셨습니다. 오늘 전태일들의 행진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어떤 행사였습니까?

◆ 김미숙> 각계각층 노동자들이 모란공원도 다녀왔고 또 2차로 거리행진을 하고 있는데. 지금 예전에 전태일께서 부르짖었던 것이 지금도 똑같이 부르짖고 있어요. 노동 현장이 하나도 달라지지 않고 그래서 많은 목숨들이 지금도 죽고 있습니다.

◇ 김종대> 1100만 비정규직의 외침이 올해 더 슬프게 들리는 이유는 바로 코로나19 때문에 가장 많은 경제적 타격을 입은 분들이 노동 약자, 비정규직 때문 아니겠습니까?

◆ 김미숙> 지금 코로나로 인해서 부당하게도 해고된 인원이 몇십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생계 수단이 끊긴 거잖아요. 그래서 그냥 거리에 내몰리고 있는데 이런 약자라고 해서 그냥 비정규직 만들어서 그냥 필요해서 써놓고 자기네들 이윤이 안 된다고 그냥 무조건 해고시키는 비정규직은 정말 없어져야 될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김종대> 오늘 또 한 분을 모셨는데요. 코로나19 때문에 폭증한 택배물량으로 14명의 비정규직 택배 노동자들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지난 10월 쿠팡 물류창고에서 근무한 뒤 갑작스럽게 숨진 고 장덕준 씨의 어머니, 박미숙 씨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 박미숙> 안녕하세요.

◇ 김종대> 대구에서 오셨다고요.

◆ 박미숙> 대구에서 왔습니다.

◇ 김종대> 멀리서 오신 귀한 발걸음에 감사드립니다. 두 분 오늘 초면이시죠? 서로 인사 좀 나누세요.

◆ 박미숙> 안녕하세요.

◆ 김미숙> 안녕하세요.

◇ 김종대> 앞으로는 자주 뵙게 되실 것 같습니다. 우리 박미숙 씨 고 장덕준 씨 어떤 아들이었어요?

◆ 박미숙> 저희 덕준이 같은 경우는 저희 부부에게는 친구 같은 아들이었고. 특히 동생들이 2명이 있어요. 얘가 항상 집에 들어올 때는 뭔가 동생을 위한 과자, 물건 이런 것들을 사오는데 특히 그날 사망하는 날은 얘가 이제 웨하스를 하나 들고왔어요.

◇ 김종대> 웨하스 과자.

◆ 박미숙> 하도 얘가 어떻게 사망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서 직접 이제 CCTV를 사망한 날 아침에 동선을 따라서 다 이렇게 찾아봤는데 편의점에서 이제 마침 첫 차를 기다리면서 웨하스를 한 개 딱 들고 오더라고요.

◇ 김종대> 거기서 샀군요.

◆ 박미숙> 네. 거기서 사서 집에 올라오는 그 웨하스에 진짜 이렇게 엘리베이터에서 웨하스를 들고 이렇게 올라오는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어요. 그래서 매일 올 때는 동생을 위해서 동생이 좋아하는 것 이렇게 하나씩 꼭꼭 챙겨서 들고 올 만큼 동생한테는 아빠 같은 그런 오빠였어요.

◆ 김미숙> 용균이도 그랬어요. (용균이는) 하나밖에 없었잖아요. 그래서 용균이는 그렇게 형제 지간의 우애를 못 느끼고 살았어요. 그게 되게 마음이 아프고 그런데 용균이도 보면 엄마 주겠다고 그 냄새 나는 은행을 주워서, 그 봉지에. 학교에서 한 20분 거리거든요. 그래서 그거를 가지고 오고 아무도 안 가져가는데 엄마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냄새 나는 걸 가지고 왔었어요. 그런 마음이 너무 고맙고 항상 마음에 있었는데. 그렇게 되고 나니까 더 저도 잘해 주지 못한 것에 맨날 마음이 아프거든요.

故 장덕준 씨의 어머니 박미숙 씨(왼쪽),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오른쪽). (사진출처=뉴스업 제작진)

 


◇ 김종대> 참으로 이 가을에 특별히 생각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은행나무가 많이 물들고 있는 마침 그 계절이네요. 오늘 박미숙 씨 국회에게 기자회견을 하셨던데요. 어떤 내용입니까?

◆ 박미숙> 저희가 쿠팡 측에 만나자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었는데 한 번도 저희를 만나주지를 않았어요. 이제 저희가 국감장에서 한 번 만나보겠다고 그때 저희 애들 아빠가 무릎도 꿇어가면서 했었는데. 직접적으로 연락 오는 것 없고 그리고 산재 신청을 하려고 해도 저희들한테 어떤 자료를 주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 김종대> 완전히 피해가는 거죠.

◆ 박미숙> 그러니까 진짜 우리를 사람으로나 생각을 하나 싶을 정도로 이 사람들이 너무 무반응인 거예요. 그래서 기자회견을 오늘 하게 되었습니다.

◇ 김종대> 그 내용은 이제 사과와 재발방지 촉구 또 여러 가지 이후에 협조를 요청하는 이런 내용이었겠네요.

◆ 박미숙> 그리고 지금 저희 같은 경우는 거의 야간근무만 했었거든요. 야간근무만 하니까 야간근무에 대한 이 심각성을 사실은 저희도 몰랐었어요. 몰랐었는데 이게 엄청 나게 위험하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에 대한 야간근무에 대한 야간노동에 대한 좀 경각심을 우리 모두에게 좀 알리고 싶어요.

◇ 김종대> 고 장덕준 씨 경우에 보니까 나중에 확인이 됐는데 하루에 보낸 게 5만 보를 걸은 게 나타났고 그다음에 취직해서 1년 만에 체중이 15kg 정도 빠진 걸로. 엄청난 노동이였네요.

◆ 박미숙> 처음 들어갈 때 몸무게 75kg 정도됐었거든요.

◆ 김미숙> 용균이도 그랬어요.

◆ 박미숙> 그런데 한 7~8월달 돼서 급격하게 빠져가지고 그때 몸무게가 한 60kg 정도. 저희가 최종 마지막 확인한 게 60kg 정도 였고. 옷 사이즈 같은 경우에는 처음 들어갈 때 허리가 34인치 정도였었는데 한 7, 8월달 그 경에는 30인치까지 가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옷을 사주었거든요. 옷이 안 맞아서.

◆ 김미숙> 들어가고 몇 달 만에 그렇게 된 거예요?

◆ 박미숙> 처음에는 4개월, 5개월까지는 그냥 한 5kg 내외로 빠졌어요. 그때는 정말 많이 걸으니까 보기 좋을 정도로 빠졌었는데 7월달 들어가면서 급격하게 빠지는 거예요. 이게 얼굴에 볼이 푹 파일 정도로 그 정도로 빠져서 그때 정말 10kg 가까이 그냥 빠진 것 같아요.

◇ 김종대> 용균 씨 경우는 어땠습니까?

◆ 김미숙> 용균이 경우는 한달 반 만에 그렇게 해서 왔거든요. 얼마나 힘들었을까. 애가 주야로 일을 하니까. 그리고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일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그냥 바로 안전교육도 없이 바로 투입이 됐더라고요. 거기다가 밤낮으로 12키로씩 이렇게 혼자서 봐야 되니까 낙탄도 떨어진 거 퍼올려야 되지 위에 지시는 계속 내려오지 이런 압박감하고 스트레스가 엄청 났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김종대> 회사측에서 우리는 그런 일 시킨 적 없다 이렇게 얘기한 거 아닙니까?

◆ 김미숙> 사측에서 하청 이사라는 사람이 용균이는 참 착실하고 일도 잘 하는데 고집이 세서 가지 말라는 곳으로 갔고 하지 말라는 일을 해서 사고가 난 거니까 용균이 보험 들어놓은 거 있으니까 그거 해결해 주겠다고 마치 자기네들이 뭘 해 주는 것마냥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나중에 용균이 동료들 몰래 만나서 물어보니까 무조건 시키면 해야 된다고 얘기를 해서 그때 아, 사측이 용균이한테 누명을 씌우고 책임을 지우려 하고 있구나를 알게 돼서 그때 싸울 결심을 했었어요.

◇ 김종대> 그러니까 동료들의 결심으로 알게 되신 것이죠.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이 느껴집니다. 이렇게 어려운 일을 그 젊은 나이에 두 아드님 모두 그렇게 참고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을 것 같아요.

◆ 김미숙> 용균이는 대학 졸업하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수십 군데 넣었거든요. 그래서 하다하다 정규직 사원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결국은 비정규직이라도 가서 일할 수밖에 없겠구나하고 마지막에 이제 비정규직으로 서부발전 쪽에 가게 된 거죠. 7개월 정도 그렇게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다가 안 돼서.

◇ 김종대> 장덕준 씨 사정도 비슷하죠?

◆ 박미숙> 저희 같은 경우도 이제 대학 졸업하고 그리고 용돈이나 생활비 정도는 벌어야 되겠다 싶어서 택배 알바를 시작을 했어요. 하다가 이제 쿠팡을 어떻게 우연하게 들어가게 되었는데 보통 2년 정도 정도하면서 무기계약직이 되는 그런 게 있으니까 그걸 한번 해 보겠다고 나름대로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13일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 전태일 열사 50주기 추도식이 진행되고 있다. 이한형기자

 


◆ 김미숙> 용균이도 그랬어요. 용균이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정규직 된다고 얘기를 했었어요.

◇ 김종대> 어떤 청년들의 어려운 노동 현실에서 사정들이 비슷비슷하게 발생하는 것 같아요. 참고 일하다 보면 나는 무기계약직 또는 정규직 될 수 있다 이런 이유가 자꾸 무리하게 되는 원인으로 촉발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면 50년 전 전태일 열사가 있던 청계광장, 그 청계피복의 시다와 같은 현실이 지금에 와서도 변하는 게 없네요.

◆ 김미숙> 제가 전태일 평전을 읽었어요. 읽으면서 우리나라가 그때 전태일이 요구했던 그러한 요구나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요구가 다르지 않아요. 똑같은 걸 지금도 요구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노동 현실이 왜 이렇게 달라지지 않을까. 나라가 이렇게 발전했으면 그 속에 일하는 노동자들도 그만한 혜택을 보고 살아야 되고 사람이 살 수 있는 만큼의 월급을 받아야 되고 그만한 혜택도 당연히 가야 되는데 아무것도 안 되고 있고 지금 그때 시다들처럼 요즘의 비정규직들이 다 이렇게 살고 있다라는 것에 너무 개탄스러웠습니다.

◇ 김종대> 박미숙 어머님도요. 산업재해 신청하시면서 호소하신 글을 보면 야간노동의 심각성을 생각해 달라. 근무환경을 개선해 달라 더 이상 우리 아들 같은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말씀하시고 계셨거든요. 50년 전에 전태일 열사가 했던 말입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러면서 조금 더 이런 어떤 소박한 바람, 호소도 거의 이행이 안 되고 있는 것이죠?

◆ 박미숙> 저희 아들 같은 경우도 일을 하면서 수시로 이야기했던 게 우리는 도구다. 우리는 노예다라는 말을 정말 많이 했었어요. 그 상황에 들어가서 쿠팡 같은 회사 같은 경우는 이 사람에 대해서는 어떤 그런 진짜 도구와 같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생산성을 높기 위한 하나의 부속품이지 인간으로 대하는 것들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당시에는 에이, 그래도 설마 쿠팡인데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지나고 나서 제가 이번에 이제 산재 신청을 하려고 동료들을 만나고 그리고 쿠팡을 알아 가는 그 과정이 이게 진짜 얘가 말하는 이게 도구가 맞았구나 이런 생각이 들 만큼 너무나 비인간적인 이게 사고더라고요. 환경도 굉장히 열악하고 여름은 정말 더워서 애들이, 거기 있는 애들이 살 빼고 싶으면 쿠팡에 가서 알바해라 이런 말이 돌 정도로 여름은 너무 덥고 겨울은 너무 춥고 그리고 먼지가 너무 많다는 거예요. 그 환경 자체가. 그래서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서 이걸 좀 개선하자 이렇게 하면 위에서 다 이렇게 다 묵살이 되어서 개선되는 경우가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흔한 매뉴얼조차도 없다.

◇ 김종대> 매뉴얼도 없다.

◆ 박미숙> 그래서 이걸 바꾸자 이렇게 이야기해도 그런 것들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런 구조들.

◆ 김미숙> 용균이는 같은 현장의 먼지 낙탄 그게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면서 엄청 나게 (분진이) 일어나거든요. 부실탄을 사오게 되면 엄청나게 더 많이 발생하는데. 그런 현장에서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고 그리고 그 위험한 일을 혼자 (하도록) 시켰잖아요. 사고 원인이 안전한데 죽는 게 아니에요. 다 안전이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니까 현장에서 그냥 위험하니까 그냥 거기서 일을 하다보면 죽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 현장에서 28번, 용균이 동료들이 시정 요구를 했는데도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그렇게 비정규직은 목소리 내도 소용 없고 해고 우려 때문에 내지를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 김종대> 전쟁터가 따로 없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진즉부터 논의됐던 것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아니겠어요. 이 부분을 국회에서 누구보다도 많이 말씀하신 게 바로 김미숙 씨고. 또 지금 국회에서도 논의 중에 있습니다. 지금 여야 간의 논의, 희망적으로 보십니까?

◆ 김미숙> 지금 이낙연 대표가 저번에 얘기하실 때는 법 통과하는 데 어렵지 않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자기가 한 말에 책임도 없고 후퇴되는 느낌을 받았고 이번에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통과하는 데 힘 보태겠다고 얘기했을 때 급하게 또 여당이 자기네들이 하겠다고 또 급하게 하고 있더라고요. 저는 정말 이런 것들이 이해가 안 가요.

이게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건 정치인들이나 국가가 맡아서 해야 되는 거잖아요. 국가가 있는 이유이잖아요.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건.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기네 당리당략에만 생각해서인지 보여주기식 행동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김종대> 그러니까 이 법을 통과 못 시키게 만드는 어떤 그 배경, 배후랄까. 어떤 힘이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 김미숙> 제일 큰 게 재계죠. 그리고 관련된 그 정치인들.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 김종대> 알겠습니다. 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만일에 국회가 통과된다면 또 다른 장덕준 씨도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쿠팡에서 자료도 안 주고 처벌할 테면 해라. 우리 과태료만 내면 된다. 이런 태도도 바꿀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점 때문에 아버님께서도 국회 가서 무릎까지 꿇고 호소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죠.

10월 26일 국회 환노위 국감 현장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고 장덕준 씨 아버지. (사진=연합뉴스)

 


◆ 박미숙> 사실은 저희 같이 이제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들은 정말 죄인이에요. 세상에 없는 그 순간부터 그게 진짜 시간이 멈춘 것 같아요, 그때 이후로. 저희 같은 경우는 지금 10월 12일 이후로 시간이 지금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때 아들과 같이 죽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떻게 뭐라고 하고 싶어요. 그런데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차마 진짜 어떻게라도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그때 애들 아빠가 무릎을 꿇고.

◇ 김종대> 국회 가서.

◆ 박미숙> 그때 이제 국민의힘 임이자 의원님께서 저희가 진짜 너무 쿠팡을 임직원이라도 만나고 싶어서 그때 국감장에 오셨다고 해서 그럼 우리 같이 만나자. 아니면 국감장에 들어가자. 그렇게 이제 이야기를 했었는데 결국은 그 의원님께서 당 차원에서 이걸 우리가 준비하는 게 있다 그렇게 해서 저희가 못 들어갔거든요, 막았어요. 그러니까 진짜 막 묻고 싶은 거예요. 그 국민의힘 당 차원에서 준비하는 게 뭔지 빨리 제발 좀 보여달라고 그러시면 진짜 우리 아들 같은 이런 죽음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게(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빨리 나오지 않으면 사실 저희 같은 여기 지금 물류창고에 이런 사고들은 이제 드러나는 수면 위에 사실은 가라앉아 있는 부분이거든요. 다른 지금 택배기사님들은14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이렇게 대책이 나왔는데 저희 물류창고 같은 경우는 이제 시작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면 또 그만한 생명이 죽고 나서 어떤 법을 또 내세울 건지 정말 그게 궁금해요. 그런데 저희가 부모인데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이게 너무 막 정말 좌절감이 느껴지는 거예요.

◇ 김종대> 저도 한때 국회의원으로서 참으로 부끄럽다는 말씀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드님이 일하시던 그 라인, 혹시 가보셨습니까?

◆ 박미숙> 아니요. 못 가봤습니다.

◇ 김종대> 안 보여줍니까?

◆ 박미숙> 검토를 해 보겠다 그렇게 말씀은 하셨는데 어떻게 만나자, 보여주겠다, 그런 답변을 안 해 주시더라고요.

◇ 김종대> 이해가 안 가네요. 유족에 대한 기본 예의 아닙니까?

◆ 김미숙> 그래서 저도 요청을 해서 이틀 만에 갔어요, 현장을 갔는데. 가는 이유가 있었어요. 애가 왜 사고가 났는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뭔지 확인하려고 들어갔습니다. 갔는데 이미 물청소를 해서 사고 은폐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 사고가 나면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는 게 기본적인 건데.

◇ 김종대> 기본이죠.

◆ 김미숙> 물청소를 했으면 사고 현장 훼손이잖아요. 그거에 대한 그 처벌이 하나도 없다라는 게 그러면 사고를 밝힐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런 그 은폐 시도를 왜 눈 감아주고 아무 처벌이 없었는지 저는 용납이 안 되고 있습니다.

◇ 김종대> 이래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박미숙 씨 경우에는 아예 가보지도 못 하셨다니까 더 충격적이네요.

◆ 박미숙> 사실은 지금 쿠팡과 계속 이렇게 논란이 되고 있는 게 우리 아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 계속 지금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들어가서 그냥 보여주시면 애가 진짜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환경인지 다 알 다 알 수 있는데 여기서 지금 그 자체를 보여주지도 않고 계속 거짓 정보만 흘려주니까 더 그게 더 화가 나는 거예요.

◇ 김종대> 이유를 밝히는 것도 아니고.

◆ 박미숙> 계속 반박만 하고 있는 거예요.

◆ 김미숙> 떳떳하면 밝혀야죠. 떳떳하질 않으니까 못 밝히는 거 아니에요. 정말 분통이 터져요, 유족으로서.

◆ 박미숙> 그러니까 저희는 더 답답하죠.

◇ 김종대> 계속 차단하고 은폐하는 모습 전혀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현장을 보면서 우리가 추모의 마음과 재발방지 대책을 같이 또 결의하고 다짐하고 나갈 수 있는 이 과정까지도 봉쇄된 게 더욱더 상실의 아픔이신 것 같아요. 공장의 노동 환경, 지금 좀 달라졌습니까?

◆ 김미숙> 우리가 말하는 발전 5사를 통틀어서 현장이 바꿔지고 노동자들 처우 개선이 달라지길 요구했는데 지금 용균이 일하는 9,10호기만 지금 조금 변화가 있었지 다른 곳은 여전히.

2019년 11월 2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태안화력발전소 故 김용균 노동자 분향소에서 고인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분향하고 있다. 박종민기자

 


◇ 김종대> 1호기부터 8호기. 나머지는 전혀 아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 김미숙> 그래서 또 한 명의 사고가 났잖아요.

◇ 김종대> 그 뒤에 났죠.

◆ 김미숙> 진짜 필요한 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만들어서 진상조사도 필요하지만 이행 점검이 진짜 필요합니다. 이게 이행이 되고 있는지 재발방지 대책만 세우는 게 아니고 이게 되고 있는지 안 되고 있는지 확인해 가면서 재발 방지 대책이 그렇게 되는 거잖아요. 여태까지 보면 맨날 큰 사고가 나면 탁상공론만 하고 대책만 세우고 그거에 이행을 안 하게끔 그렇게 했으니까 계속 사고 나는 거잖아요. 그래서 정말.

◇ 김종대> 그렇습니다.

◆ 김미숙> 이런 것들이 그냥 말로만이 아니고 진짜 실행이 되는지 안 되는지 확인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 김종대> 현장에서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게 만드는 진정한 원인이 혹시 어떤 위험의 외주화, 하청 관계 이런 데서 구조적으로 더 강요되는 거 아니냐.

◆ 김미숙> 지금 용균이 특조위 조사를 보면 원청은 하청을 줬으니 책임이 없다고 하고. 또 하청은 또 내 사업장이 아니니까 그거 건들 권한이 없으니까. 안전조치 못 한다고 얘기를 해요. 그래서 원하청에 아무도 안전에 대한 책임이 없으니까 그 사고가 나면 꼬리자르기식으로 말단 직원만 처벌이 되고. 또 그것도 안 되면 사고 당사자가 잘못해서 죽었다고 여태까지 결론이 다 그렇게 났어요. 대부분이 그렇게 났기 때문에 이거는 원하청이 책임을 안 지려고 만든 구조거든요.

월급도 최저임금이 꼭 최고임금인양 요즘 되고 있잖아요. 그런 것들도 다 이윤을 원청이 가져가기 위한 수단이고 원청이 사고 책임도 안 지고 또 사고가 없으니까 세금 감면 혜택으로 수십 억 가져가고. 그리고 또 이미지도 얼마나 좋아져요. 그러면서 이런 사고는 반복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 김종대> 위험과 책임은 털어버리고 이익은 가져가겠다는 이 구조가 문제다. 박미숙 씨, 지금 우리 김미숙 이사장 이야기 들으시면서 정말 이런 게 우리나라 일반적인 일이구나, 정말 일상이 돼 버렸구나 이런 생각 많이 하실 것 같고 또 더불어서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아요.

◆ 박미숙> 사실은 제가 우리 아들이 이렇게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는 사실 이런 데 관심이 없었어요. 노동 문제, 누가 죽었다고 그러면 이게 남의 일이었거든요, 남의 일이었고. 이렇게 이 환경이 열악한지는 몰랐어요. 그런데 진짜 제 아들이 딱 죽고 나니까 이게 내 일로 다가오면서 그리고 얘네 동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데 이 환경이 너무나 열악한 거예요. 제가 이제 좀 급해서 애들한테 인터뷰 요청을 하고 이렇게 하면 "어머니, 이거 저희 밥줄이에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제가 그러니까 우리 애랑 똑같은 애들을 앞에 두고 이거를 인터뷰 좀 해 달라 이런 말을 제가 진짜 못 하겠더라고요.

하물며 사실은 지금 택배 어디 다닌다 그러면 사회에서 보는 시선이 이렇게 내려보거든요. 정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 택배회사라고 생각하는데 거기에 다니는 아이들은 정말 여기 아니면 우리 밥 못 먹고 살아요, 이 말을 하는데.

◇ 김종대> 절박하군요.

◆ 박미숙> 그래서 정말 더 화가 나는 거예요. 저희가 막 인터뷰를 하고 다니면서 제일 많이 듣는 게 너희들이 선택했잖아 너희들이 선택해서 갔잖아. 안 갔으면 됐잖아, 그 얘기를 해요. 그 애들한테요. "그러면 우리 밥 굶어죽어요? 도둑질해요?" 이렇게밖에는 걔네들한테는 안 다가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말 저희들은 정말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게 저는 생각하기를 이거는 정말 걔네들한테 박수를 쳐줘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자기 그 몸으로 정당한 노동을 해서 받는 대가인데 그거를 우리는 너무 나 홀대하고 있다는 거예요. 제가 지금 부딪히는 현실은 그랬었거든요. 걔네들 정말 열심히 일해서 이렇게 돈을 버는데도 그것조차도 우리는 인정을 안 하는 이런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구나라는 게 이게 정말 제가 다니면서도 너무나 부끄러웠어요.

◆ 김미숙> 저도 말씀하신 대로 정말 용균이 사고 나고 그렇게 알았거든요. 똑같은 말씀하시고 지금 얘기 듣고 보니까 정말 다르지 않고 똑같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 김종대> 두 분 앞으로도 하실 이야기가 더 많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좀 자주 만나셨으면 좋겠고요. 두 분께 하나씩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진짜 이루어졌으면 하는 변화가 무엇인가 각기 한마디씩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박미숙 씨 들려주시죠.

◆ 박미숙> 사실은 이제 아들이 살아 있을 때 이제 그냥 우리 그냥 이야기 삼아 했던 이야기가 세월호나 아니면 지금 옆에 이제 계신 김용균 씨나 이런 분들이 사고가 나서 이제 사람들이 막 데모를 한다거나 이런 일들이 있었을 때 애들 아빠 같은 경우는 그냥 진짜 왜 저렇게 끝까지 하느냐 그냥 대충 합의하고 그냥 끝내면 되는데 왜 하느냐 그러면 아들하고 저랑 같이 싸운 거예요. 아들이 얘기했던 말이 아버지 만약에 아버지 아들이 그렇다면 그때 아버지 그렇게 말씀하실 거냐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그런 걸로 되게 많이 싸웠죠. 그런데 지금 이제 막상, 지금 저희 일이 되어 버리고 나니까 애들 아빠가 이제 아들이 그때 했던 말들에 대해서 진짜 지금 반성을 하는 거예요. (반성을) 하면서 그러는 거예요. 지금까지 저희가 올 수 있었던 이유도 아들의 그 말 때문에 저희가 차마 여기서 멈추지를 못 하는 거예요.

◇ 김종대> 그렇군요.

◆ 박미숙> 보면 지금 이제 이렇게 해서 그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려면 저희가 이제 맞서서 이 환경을 변화를 시키든지 저희가 어떤 식으로든지 행동을 해야 되는 시기가 된 거죠. 어쩌면 아들이 우리한테 주어진 숙제라고 저희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 사회가 이렇게 조금 더.

◇ 김종대> 아들이 준 숙제.

◆ 박미숙> 늘 아들이 이야기했던 것들이었어요. '우리는 쿠팡을 이길 수 없어요' 라는 그 말. 항상 죽기 직전에 애가 그렇게 얘기해서 일은 너무 힘들고 자기가 이걸 좀 바꿔야 되는데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것들이 변화가 되지 않는 그 모습을 애가 와서 이야기를 좀 많이 했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했던 말이 진짜였어요. 우리는 노예다. 우리는 쿠팡을 상대로 이길 수 없다 그 말이 지금 저는 너무너무 가슴이 아프거든요. 그때 왜 조금 더 귀 기울이지 못했을까라는 반성. 그것 때문에 진짜 이거는 좀 더 많이 바뀌어나가고 지금은 제 일이지만 이게 지나고 보니까 정말 우리의 일이구나. 우리 모두의 일이 될 수 있겠다라는 걸 제가 이제 우리 아들 죽고 나니까 그걸 느끼겠어요. 그래서 이 사회는 정말 우리 아들 같은 누군가의 가족이 또 죽어서 이렇게 슬픈 일이 일어 나지 않는 여기서 좀 끊었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입니다.

◇ 김종대> 바로 그 바람이시군요. 알겠습니다. 김미숙 씨.

◆ 김미숙> 저는 노동하면서 안전하게끔 일할 수 있고 그리고 모든 노동과 생명이 가치 있게 해야 되고. 용균이는, 하나밖에 없는 용균이는 정말 부모 목숨보다 더 소중하고 저희가 죽어도 애가 살아 있으면 정말 금방이라도 바꾸고 싶은 그런 심정으로 살았는데 이렇게 저희 희망을 꺾어버렸습니다. 가족들은 이런 유족들은 정말 사는 게 정말 비참합니다. 그러니까 정말 어느 곳을 다니든 세월호처럼 그렇게 가습기처럼 그렇게 당하지 않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기업인들은 이 법을 막는 이유가 최고책임자를 처벌한다고 그리고 공무원 처벌하는 것도 되게 반대를 하고 있는데 이게 처벌하기 위해서만 저희가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벌함으로써 안전한 현장을 만들라는 요구입니다.

◇ 김종대> 사실 외국에서는 이미 시행 중인 법입니다. 우리 사회가 기업 위축시킨다고 엄청나게 어려운 것처럼 얘기하지만.

◆ 김미숙> 기업만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고 노동자들, 그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김종대> 사실 우리 김미숙 이사장님 말씀은 항상 우리가 같이 책임지자는 취지로 예전부터 계속 이 말씀을 해 주셨어요. 저희가 잘 듣고 있었고요. 또 앞으로도 기억하고 함께하겠다는 말씀드립니다. 두 분 어려운 걸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박미숙> 감사합니다.

◆ 김미숙> 감사합니다.

◇ 김종대> 지금까지 김용균재단의 김미숙 이사장, 쿠팡 물류센터에서 일한 뒤 숨진 고 장덕준 씨 어머니 박미숙 씨와 함께 이야기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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