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륙 준비하는 대한항공 비행기. (사진=연합뉴스 제공)
대한항공 소속 기장이 비행 도중 술을 요구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지만, 별다른 징계없이 수개월간 정상 근무를 이어온 것으로 확인됐다.
승객의 안전과 직결되는 중대 사안임에도 회사는 구두 경고에 그쳤고, 기장의 음주 요구를 문제삼은 사무장만 되레 강등 조치되는 불이익을 당했다.
8일 CBS노컷뉴스 취재 결과, 대한항공 김모 기장은 지난해 12월 30일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여객기에 올라타면서 '웰컴 드링크'(welcome drink)로 마련된 음료 가운데 샴페인을 집으려했다.
승무원이 당황해하자 김 기장은 "(샴페인잔이 아닌) 종이컵에 담아 주면 되지 않냐"고 핀잔을 주고서는 다른 음료를 가지고 돌아섰다. 하지만 김 기장의 주류 요청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몇 시간 뒤에도 같은 승무원에게 물을 달라고 말하면서 "종이컵에 와인 한 잔 담아주면 안되겠냐"며 재차 술을 요구한 것이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자 해당 승무원은 "비행중에 술은 절대 마시면 안 된다"고 제지한 뒤 A사무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이후 A사무장은 함께 탑승한 다른 기장과 부기장에게도 상황을 전파했다. 다만 사안을 당장 문제 삼을 경우 비행 안전을 책임지는 김 기장의 심리에 불필요한 동요가 생길 것을 우려해 착륙 전까지 김 기장에게는 따로 언급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과 달리 부기장이 먼저 당시 상황을 김 기장에게 전달했고, 이를 알게 된 A사무장이 항의하면서 부기장과 A사무장 사이 거친 언쟁이 오갔다. 결국 A사무장은 암스테르담 도착 당일 회사에 김 기장의 음주 시도 사실을 정식으로 보고했다.
귀국 이후 회사는 김 기장과 A사무장 등 사건 관계자들을 불러 자체 조사를 진행했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술을 요구했던 김 기장에게는 구두 경고만 내려졌고, 사건을 회사에 보고한 A사무장은 팀장에서 팀원급으로 강등됐다. A사무장이 부기장과 언쟁하는 과정에서 폭언을 했고, 김 기장 관련 내용을 외부 익명 게시판에 올렸다는 이유에서다.
현행법상 기장의 음주는 3년 이하 징역에 처하는 엄중한 일이지만, 회사는 "농담으로 한 말이고 실제 음주를 한 것도 아니다"라며 김 기장에게 징계를 내리지 않고 구두 경고에 그쳤다.
더욱이 회사는 해당 사안을 사내 상벌심의위원회에 넘기지 않은 건 물론 관리·감독 당국인 국토교통부에도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사건을 덮기에만 급급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대목이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김 기장이 빌미를 제공한 건 맞다"면서도 "김 기장과 A사무장 사이 의사소통에 오해가 있어 발생한 사건으로 운항상 안전 저해 요소는 없었다고 보고 사건을 종결 처리했다"고 밝혔다.
이어 "보고서와 진술서에 당시 상황이 모두 기재돼 있어 회사가 사건을 부인할 수도, 은폐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며 "다만 A사무장에 대한 강등은 폭언, 내부문서 외부 유출 등 관리자로서 자질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취한 조치"라고 해명했다.
전문가들은 실제 음주 여부를 떠나 술을 요구한 자체만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한국교통대 항공운항학과 이근영 교수는 "조종간을 잡는 기장이 알코올 음료를 요구하는 건 당연히 심각한 문제이면서 말이 안 되는 일"이라며 "회사 차원의 재발 방지 대책은 물론 처벌과 교육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