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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골리앗 크레인'이 눈물 흘리기 전에 '말뫼·빌바오'를 기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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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현대중공업 제공/자료사진)

 

지금으로부터 약 50여 년 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남쪽으로 500㎞ 떨어진 해안도시 '말뫼'(Malmö)는 풍요의 땅이었다. 이곳에 자리한 '코쿰스'(Kockums)는 세계 최강의 조선업체로 스웨덴의 자부심이자 말뫼의 상징이었다. 말뫼 시민들은 코쿰스의 번영과 더불어 도시와 가정의 윤택한 살림이 영원하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오래지 않아 깨졌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조선업의 신흥 강국으로 급부상한 아시아의 대한민국에 밀리기 시작하더니 선박 수주 물량이 제로로 떨어지는 일이 현실로 닥쳤다. 단 한 척의 선박도 수주하지 못한 코쿰스는 1986년 문을 닫았다. 실업자가 된 시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다른 도시로 떠났다. 당시 썰물처럼 빠져나간 시민이 3만여 명에 달했다. 말뫼의 풍요는 30여년 만에 막을 내렸다.

스페인 북부의 항구도시 '빌바오'(Bilbao)는 유럽 제철산업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에 자리한 '시드노어'(Sidenor)는 스페인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철강기업으로 빌바오에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시민들은 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시드노어'가 망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상상할 수 없던 일이 벌어졌다. 아시아의 일본과 한국 신흥 철강기업 포스코가 급부상하면서 용광로의 불을 꺼야만 하는 비극이 닥쳤다. 빌바오를 스페인에서 가장 풍요로운 도시로 만들어주었던 철강산업이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붕괴한 것이다. 시민들은 문을 닫은 제철소의 용광로를 '더러운 콧구멍'이라 불렀다. 유럽은 물론 세계 철강업계에서 명성을 떨친 빌바오의 '시드노어'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말뫼 조선소의 상징물이었던 장대한 '코쿰스 크레인'은 2003년 대한민국 동남쪽 해안도시 울산으로 옮겨졌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것을 현대 정주영 회장이 단돈 1달러에 매입했다. 울산 사람들은 그것을 '골리앗 크레인'이라 불렀다. 한국의 조선업은 승승장구해 세계 1위 자리를 차지했고, 울산은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도시로 탈바꿈했다. 시민들은 현대 조선소의 '골리앗 크레인'이 영원무궁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세계 조선업계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 스웨덴이 1위 자리를 한국에 빼앗긴 것처럼, 한국 또한 중국에 수주는 물론 발주량 1위 자리를 빼앗겼다.

빌바오가 자랑하던 철강기업 시드노어를 몰락시키는 데 일조한 대한민국 남동쪽 해안도시 포항은 30여 년 동안 풍요를 누렸다.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위기가 닥쳤을 때도 포항은 포스코의 호황에 힘입어 끄떡하지 않았다. 불황을 몰랐던 포항 하늘에 먹구름에 깔리기 시작했다. 신흥강국 중국의 공세로부터 파죽지세 밀리는 형국이다. 영일만의 밤바다를 휘황찬란하게 수놓던 야경이 하루 아침에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빌바오의 시드노어 용광로가 어느 날 거짓말처럼 차갑게 식었듯이.

세계 조선업을 호령하던 스웨덴이 '신흥국' 대한민국에 무릎을 꿇던 날 스웨덴 국영방송은 '코쿰스 크레인'이 분해되어 한국으로 실려 가는 장면을 말뫼 현지에서 생중계를 하며 장송곡을 흘려보냈다. 부두에 나와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눈물을 흘렸다. 믿기지 않겠지만 불과 13년 전 일이다.

말뫼는 조선업 붕괴 이후 친환경 생태도시로 변신을 시도했다. 코쿰스 크레인이 있던 자리에 꽈배기처럼 90도 뒤틀린 독특한 형상의 건축물 '터닝 토르소'를 세우고, 도시 전역을 철저하게 친환경 공간으로 바꿔나갔다.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선도적인 저탄소 친환경도시로 부활해 유럽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변신했다.

빌바오는 철강산업 붕괴 이후 도시재생사업을 벌여 구겐하임 미술관을 유치했다. 이 미술관은 1997년 문을 열자마자 대성공이었다. 빌바오는 미술관과 더불어 도시 전체를 예술화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그 결과 전 세계에서 연중 1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빌바오를 찾아온다.

<인왕경>(仁王經)에는 '번성한 후에는 반드시 쇠퇴한다'는 성자필쇠(盛者必衰)의 이야기가 나온다. 닥쳐오는 위기 앞에 이 글귀로 위로를 삼자는 얘기가 아니다. 이미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자각했다면 서둘러 다시 성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최선이라는 의미다. 스웨덴의 말뫼와 스페인의 빌바오 두 도시가 어떻게 되살아났는지 살펴보면 답이 보인다.

위기의 울산·포항·거제가 지금으로부터 30년 뒤, 어떤 도시로 부활해 있을지는 전적으로 시민들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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