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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세없는 복지는 가능한가. 정권 초부터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양 진영에서 의문을 품던 주제이다.
세법 개정 논란으로 증세와 복지 담론이 주요 쟁점으로 부각됐지만 청와대는 여기에 휘말릴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정치권은 날선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덮기에 급급하다. 여당은 물론 야당 내부에서도 이 민감한 주제를 쉽게 건드리지 않으려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대다수 세제, 복지 전문가들의 생각은 달랐다. 현 상황에서 증세 없이는 복지 재원을 마련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에 증세와 복지 논쟁을 사회적 토론의 장으로 내놓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 강병구 "증세 없다 전제 달지 말고, 터놓고 토론하는 자리 만들어야"강병구 인하대 교수(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소장)는 "여야와 시민단체를 포괄해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증세없는 복지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열어놓고 토론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박근혜 대통령도 선거 과정이나 정권 초반에 '추후 세수증대가 필요하다면 국민적인 논의를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면서 "조세 저항이 있을 수 있지만 공약 이행과 복지 증대를 위해 증세가 필요하다면 국민들에게 필요성을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강 교수는 과세에 공평성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다수 중산층의 동의를 얻으려면 고소득자, 자산가 등 상위 1%에 초점을 맞춘 증세가 병행돼야 한다는 것.
강 교수는 또 정부가 조세 저항을 우려해 부가가치세 등 간접세 인상에만 비중을 두는 것과 관련해 소득의 역진성이 더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은 2010년도 들어 늘어나는 복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소비세 인상을 추진함과 동시에 소득세 최고세율을 40%에서 45%로 인상하는 부자 증세를 함께 추진하면서 형평성을 꾀하려 노력했다.
소비세 등 간접세가 가지고 있는 소득 역진성을 완화하기 위해 직접세 인상을 같이 추진했다는 것.
강 교수는 "정부의 세법 개정안에 대한 저항이 거세진 것도 고액 자산가과와 재벌 등 상위층들에게는 많이 걷지 않고 직장인의 유리지갑만 털려서 불공평하다는 심리가 만연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면서 "소비세 인상과 함께 부자 증세를 추진하면서 균형을 맞추려 한 일본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설명했다.
◈ 오건호 "지킬 수 없는 약속은 정권 신뢰만 깎아, 솔직히 이야기하자"증세없이 복지를 추진하겠다고 공언하다 오히려 정권의 신뢰를 잃은 일본의 경우를 다시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위원장은 "2009년 일본 민주당이 집권할 당시에도 박근혜 정권처럼 증세없이 세출구조개혁만 하겠다고 공언해서 집권에 성공했다"면서 "결국 집권 이후에 소비세 인상이 결정되면서 정치권이 신뢰를 잃었고 정권이 무너졌다"고 지적했다.
오 위원장은 "증세없이 복지를 할 수 있다고 계속 강조하면, 정작 증세가 필요한 시점에서 또다시 말바꾸기 논란에 휩싸여 동력을 잃게 된다"면서 "증세는 증세대로 복지는 복지대로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국민들이 세금에 대해 예전처럼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투명하게 증세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며 "무상급식, 무상보육 등 자녀를 키우는 집은 복지가 최근 몇년사이에 실생활에서 체감이 되고 있고 기초연금과 고교무상교육 등 유의미한 질적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며 변화된 여건을 상기시켰다.
오 위원장은 또 "'부자증세'보다는 '복지증세' 등으로 슬로건 변화를 꾀해야 한다. 중산층은 물론 상위층을 포괄한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 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 윤영진 "법인세 인상은 '돈맥경화' 해소할 것"전문가들은 법인세가 지나치게 성역화돼 있는 점도 꼬집었다. 윤영진 계명대 교수는 "법인세 인상이 오히려 기업에 막혀있는 돈을 풀어 내수를 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현재 우리 경제는 대기업에 돈이 집중되는데 중산층 이하에 풀리지 않는 '돈맥경화' 현상을 겪고 있다"면서 "그것을 뚫어주는 방법은 세금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부자들은 눈치보고, 서민과 중산층은 쓸 돈이 없어 내수가 얼어있는 상황에서 이를 해결하는 것은 돈이 돌게 하는 것이다"면서 "기업들이 돈을 더 걷으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처럼 여기는데 오히려 증세를 통해 중산층과 서민경제에 낙수효과가 발생하면서 경제가 선순환될 수 있다"고 발상의 전환을 촉구했다.
"실제로 기업들이 투자결정을 할 때에 법인세는 거의 미미한 변수이다. 법인세 인상이 기업 투자 위축으로 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인구 문제나 세금, 복지 등 이번 정권은 경계선에 서 있는 시점이다"면서 "대통령이 국민과 직접 상대해서 설득하고 풀어가야 한다"고 소통을 강조했다.
◈ 김유찬 "복지 슬그머니 축소말고 사회적 논의 시작해야"김유찬 홍익대 교수는 "현재로서는 비과세 감면, 세출구조조정, 지하경제 양성화 같은 정책들이 135조원이나 되는 모든 복지 비용을 감당하기에는 벅찬 것은 명백하다"면서 "그런데도 증세는 안하겠다고만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지하경제 양성화의 경우 FIU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금융정보분석원의 정보이용범위가 축소돼 기대세수가 대폭 줄어들었다.
게다가 비과세 감면은 세법 개정안이 후퇴하면서 세수효과가 4천4백억이나 축소했고, 세출구조조정은 역대 정권들이 계속 시도했지만 성공하기 어렵다고 김 교수는 내다봤다.
김 교수는 "이러다 결국 복지가 슬그머니 축소되는 방향으로 끝날 가능성이 많지 않겠느냐"면서 "정말로 복지에 방점이 찍혀 있다면 대통령이 국민을 설득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했다.
경제 살리기와 동의어처럼 여겨지는 법인세 동결론도 이제는 풀어야 한다고 김 교수는 주장했다.
김 교수는 "법인세 인상이 기업 투자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법인세 유지로 혜택을 보는 것은 법인 뒤에 숨어 있는 대주주이다"면서 "그런데 오히려 일감몰아주기 규제도 당초보다 약화됐고 가업상세공제를 높여주는 등 반대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김 교수는 "근로자에 대한 세금을 걷는 동시에 기업, 고액자산가에 대한 세부담도 늘려야 한다. 그래야 설득이 된다"면서 "대통령이 방향을 명확하게 잡고, 국민을 설득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 사회적 토론의 장이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이같은 전문가들의 충고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연일 '증세는 없다'는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20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최근 정부가 증세 없는 복지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지적이 있는데 정부가 국민에 대해서 가져야 될 기본자세는 국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부담을 적게 해 드리면서도 국민 행복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가 '최선의 노력'을 다해도 공약 이행을 위한 135조원의 재원 충당이 안 될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뾰족한 답이 없어 증세와 복지 논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