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에 위치한 한 범죄단지 모습. 남성경 기자(전편 요약) 용접 일로 생계를 이어가던 오선호씨. "통장을 팔면 개당 500만 원을 준다"는 동네 형(대포통장 '모집책')의 제안에 친구 종우씨와 함께 지난해 6월 27일 캄보디아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캄보디아 보코산 한국인 대학생 고문·살해 사건'의 주범, 통장 구매자 '리광호'를 만난다. 처음엔 통장만 넘겨주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선호씨의 착각이었다. 통장을 둘러싼 싸움에 휘말려 선호씨와 종우씨는 결국 시아누크빌 범죄단지 '웬치'에 팔려가게 된다.
9층과 1층. 926호에서 자고, 106호에서 일한다. 숙소와 사무실만을 오가며 보이스피싱 범죄에 투입된 선호씨는 지금도 방 번호를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시아누크빌 범죄 단지에는 식당부터 카지노, 노래방, 편의점, 유흥 시설 등 없는 게 없었다.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지만, 굳이 나갈 필요도 없는 감옥이었다.
캄보디아에 발이 묶인 지 두 달 정도가 지난 지난해 9월 1일. 그곳에서 오선호씨는 두 번째 악연을 만났다. 구태성(가명) 팀장. 그는 대화가 통하는 사람 같다가도 수틀리면 가차 없이 주먹을 휘두르는 폭력배였던 것으로 선호씨는 기억한다.
이름 지워진 '단절된 세계'
선호씨와 종우씨가 투입된 새로운 조직의 관리자는 구 팀장과 '페페'로 불리는 중국인이었다. 첫날, 건물 1층 식당에 소집된 선호씨와 종우씨는 함께 일할 한국인 8명을 처음 마주했다. 제각기 이유와 사정으로 이곳에 모인 낯선 사람들. 적막만이 감돌았다.
"서로 실제 이름은 말하지 않을 것"첫 번째 규칙이었다. 1호부터 10호까지 서로를 번호로 부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선호씨는 1호(그린), 종우씨는 2호(옐로우)가 됐다. 그렇게 이름은 지워졌다.
곧바로 모두가 사무실이 있는 106호로 이동해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사무실 안에는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가 앉을 수 있는 '나무통 부스'가 총 10개 설치돼 있었다. 통 내부와 외부에는 방음 처리를 위해 고무 발포제가 두껍게 덧대져 있었다.
사무실 한편에는 10대가 넘는 컴퓨터가 마련돼 있었다. 휴대전화, 아이패드 등 기타 업무에 필요한 전자 기기들이 양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을 만큼 큰 상자에 가득 담겨있었다고 한다.
오선호씨가 묘사한 사무실 내부 모습을 바탕으로 AI가 구현한 이미지. AI 생성 이미지구 팀장과 페페는 A4용지 여러 장 분량의 '보이스피싱 대본'을 나눠줬다. 대본을 암기해 실제 말하듯이 읽는 훈련을 받았다. 임파선 부종으로 말하기조차 어려운 상태였던 종우씨는 훈련에서 열외가 됐다.
"목소리 톤을 차분하게 유지해라", "고객을 대하는 말투로 이야기해라"
일종의 역할 훈련이 진행되면서 구 팀장과 페페의 구체적인 피드백이 오갔다. 선호씨를 포함한 9명은 '고객'과 '사기꾼' 역할을 번갈아 가며 늦은 밤까지 연습했다고 한다. 보이스피싱 교육은 살벌한 분위기에서 진행된 것으로 선호씨는 기억한다. 실수하면 언제든 주먹과 방망이가 날아올 것 같은 긴장감이 가득했다고 선호씨는 자수서에 썼다.
그렇다고 도망갈 수도 없었다. 사무실 주변으로 삼엄한 경비가 있어 탈출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인 데다, 여권 등 대부분의 소지품을 빼앗겨 탈출해도 곧바로 구출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웬치는 작은 마을이자, 모든 것이 통제되는 범죄 소굴이었다.
도망친 이들 '몸값' 10억을 떠안다
캄보디아에 위치한 한 대규모 범죄단지 외관. 남성경 기자숙소 929호에는 선호씨와 종우씨, 그리고 3호(레드)가 함께 지냈다. 지옥 같던 교육이 끝난 다음 날 아침, 구 팀장이 방문을 거칠게 열고 들이닥쳤다.
구 팀장은 방문과 가장 가까이 있던 3호의 배를 다짜고짜 걷어차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선호씨가 기억하는 첫 폭행의 순간이다. 이어 선호씨와 종우씨에게도 무자비한 폭행이 가해졌다. 선호씨가 "도대체 왜 때리는 것이냐"고 물자 돌아온 답은 황당했다. 간밤에 선호씨와 종우씨, 3호를 뺀 나머지 한국인 7명이 모두 도망쳤다는 것.
"얘네 다 도망갔다고. 얘네도 리광호한테 사 온 애들이야. 너네도 리광호한테 팔려 왔잖아. 너네 책임이야."구 팀장은 이어 말했다.
"리광호가 지금 연락이 안 돼. 너네가 보이스피싱 매출로 갚아"도망간 사람들의 '몸값'을 범죄 수익으로 갚으라는 억지. 선호씨와 종우씨, 그리고 3호가 그렇게 억지로 떠안게 된 빚이 자그마치 10억이었다고 선호씨는 진술했다.
선호씨는 무엇보다 아픈 친구 종우씨가 걱정됐다. 가족 같은 친구였다. 몸이 아프다고 일을 빼줄 것 같지 않던 상황에서 선호씨는 종우씨가 회복될 때까지 쉬게 해주는 조건으로 2인분 몫의 일을 하겠다고 자처했다고 한다.
구 팀장 : 하루에 콜 쳐야 되는 양이 100개인데, 너가 200개 쳐라. 그럼 그렇게 해줄게.
선호 : 알겠다. 200개 치겠다.
그 대가로 종우씨의 치료도 약속받았다고 한다. 종우씨 역시 상태가 나아지면 일에 투입되기로 했다. 이렇게 친구의 몫까지 떠안아 범죄에 투입됐다는 게 선호씨의 진술 내용이다.
노쇼사기는 어떻게 이뤄지나
그렇게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됐다. 선호씨가 속한 조직은 총책 일명 '마중'으로 불리는 자가 운영하는, 이른바 '노쇼 사기'(공공기관 관계자를 사칭해 전화로 대규모 물품을 예약하며 값을 받아낸 후 잠적하는 신종 사기 수법) 범죄 조직이었다.
1호로 불리던 선호씨는 '영배'란 또 다른 이름을 부여받았다. 범행 시 사용하는 활동명이다. 범행 수법을 자세히 진술한 내용이 그의 피의자 신문 조서에도 담겨있다.
먼저, 1차 상담원이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어 군부대 등을 사칭해 햄버거 패티 등을 대신 구매(유통)해달라고 하면서 '○○푸드' 명함을 전달한다. 피해자가 '○○푸드'로 연락하면, 2차 상담원이 전화를 받아 실제 햄버거 패티 등을 판매하겠다고 속여 입금을 유도하는 수법이다.
선호씨는 1차 상담원 역할을 맡았다. 2차 상담원은 구 팀장이었고, 그는 '정우'라는 가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구 팀장의 업무 지시도 구체적이었다. 구 팀장은 군부대와 실제로 계약했던 업체 명단 100개를 뽑아 매일 선호씨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선호씨는 그 명단에 적힌 회사에 일일이 전화하면서 유통 의향이 있는 고객을 낚았다.
일례로 선호씨는 지난해 9월 26일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희 8전투비행단 소속인데, 추석 연휴를 맞아 군 장병들에게 한우 패티를 제공하려고 하거든요. ○○푸드를 통해 식자재 구매해서 납품해 주시면 대금을 드릴게요."
이어 사흘 뒤인 9월 29일, 구 팀장은 ○○푸드에서 근무하는 직원인 것처럼 피해자와 통화하며 "지정된 계좌로 돈을 입금하면 식자재를 납품해 주겠다"는 취지로 입금을 요구했다.
이같은 수법으로 선호씨는 피해자 총 5명으로부터 약 4억 원을 뜯어내는 일에 가담하게 됐다.
범죄 수익을 올리면서 선호씨는 점점 범죄 조직에 스며들었다. 구 팀장과 텔레그램으로 소통했던 대화 기록에는 선호씨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서 피해자를 속일 수법을 고민하고, 피해자를 물색하는 내용도 남아 있다.
다만, 사람을 낚아 돈을 가로채는 범죄에 젖어 들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도 사실이라고 선호씨는 자수서에 적었다. 도망간 한국인들의 몫까지 떠안아 매출을 올려야 하는 상황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친구 종우씨의 몸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억압된 환경에 대한 적응과 순응, 양심의 가책, 친구에 대한 걱정 등이 그의 마음을 번잡스럽게 어지럽혔다. 그래도 이렇게 평생 범죄를 저지르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탈출을 결심했다. 실패하면 죽을 수도 있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빠져나가야만 했다. 앞서 도망간 사람들도 있지 않던가. 선호씨는 틈을 찾기 시작했다.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