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고용노동부가 현대제철 당진제철소에 하청노동자 1213명을 직접고용하라고 내린 시정지시는 단순한 행정 처분을 넘어 우리 사회의 왜곡된 고용 구조와 '위험의 외주화'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이제 관건은 노동부가 경고를 넘어, 원청 업체가 하청노동자들의 고용과 노동조건을 책임지도록 실제 압박할 의지가 있느냐 여부다.
24일 노동부에 따르면, 대전지방고용노동청 천안지청은 지난 19일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하청업체 10곳의 62개 생산공정에 대해 불법파견이라 판단했다.
이에 따라 천안지청은 현대제철이 이들 하청노동자 1213명을 직접고용하라고 시정지시했다. 2021년 749명 고용에 이어 두 번째 직접고용 지시다.
노동계에서는 거대 기업이 십수 년간 법망을 피해 온 관행에 마침표를 찍으라는 통첩이자, 올해 본격 시행되는 개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란봉투법) 시대의 향방을 가늠할 결정적 지표라고 평가한다.
경영계 "기업 옥죄기"라지만…거듭된 '불법 파견' 판단
그동안 현대제철이 여의도 3배 규모에 달하는 거대한 당진제철소를 사실상 불법으로 고용한 하청노동자들로 지탱해왔다는 사실이 이번 시정지시로 다시금 확인됐다.
경영계와 일부 언론들은 최근 철강 업황이 부진하고 통상 환경의 불확실성이 크다는 이유로 이번 판결을 '기업 옥죄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이를 10년 가까이 지속된 불법 행위를 덮으려는 무책임한 주장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시민단체 '손잡고'의 윤지선 활동가는 "불법을 저질러야만 운영할 수 있는 산업이라면 그 산업 모델 자체에 대해서는 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윤 활동가는 "이미 2021년에 내려진 119억 원의 과태료조차 단 한 푼도 내지 않은 채 소송으로 버티며 불법 상태를 유지해 온 것이 현대제철의 실체"라며 "회사는 소송을 악용하면 10년 이상 시간을 끌 수 있다는 학습 효과를 노리고 국가의 행정력을 무력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소송을 통해 직접고용을 피해온 회사는 현대제철만이 아니다. 최근 현대자동차는 '사내 2차 하청노동자의 불법파견' 사건을 인정한 파기환송심 결과에 지난달 31일 재상고했다.
1심에서는 하청노동자가, 고등법원에서는 사측이 각각 번갈아 승리했지만, 결국 대법원은 하청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주며 사건을 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어 파기환송심에서도 대법원 판결을 적극 인용하며 2차 하청노동자들의 지위를 인정했다. 하청노동자들이 소송을 제기한 후 약 9년 8개월 만에 불법파견이 인정됐지만, 현대차가 이에 불복하고 다시 소송을 이어가기로 결정하면서 소송기간은 10년을 넘어갈 전망이다.
정부가 '위험의 외주화' 공식화한 셈
연합뉴스이번 시정지시는 현대제철 당진제철소가 전형적인 '위험의 외주화' 사업장이라고 정부가 공식 인정했다고도 볼 수 있다.
현대제철에서는 2022년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에도 낙하, 끼임, 추락, 가스 누출 등 후진국형 사고가 끊이지 않아 6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특히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당진제철소는 하청 노동자의 사고 발생률이 원청 노동자보다 최대 10배나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현대제철이 위험한 업무를 하청노동자들에게 몰아넘겼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불법 파견과 위험의 외주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 김유정 법률원장은 "불법 파견이 인정됐다는 것은 하청업체가 독립적인 설비나 전문성 없이 오직 원청의 지휘 아래 소모품처럼 쓰였다는 증거"라며 "위험한 설비를 관리·감독하고 안전장치를 설치하는 권한을 원청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는 점이 이번 시정지시로 다시 한번 확인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하청만의 책임이 아니라 시설 관리권을 쥐고 있는 원청의 책임이라는 점이 더욱 분명해졌다"며 "위험을 통제할 권한은 원청이 행사하면서 사고의 책임만 하청에 떠넘기는 구조를 타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란봉투법 시행 이후 현대제철, 교섭에 나올까
노동부의 이번 시정지시는 노란봉투법 시행과 맞물려 현대제철의 사용자성을 입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동안 현대제철은 하청노동자들의 노동조건에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면서도 "우리는 사용자가 아니다"라며 교섭을 거부해 왔다. 그러나 이번 시정지시로 이러한 회피 전략은 설 자리를 잃게 됐다.
금속노조 김 법률원장은 "시정지시는 하청 노동자들이 원청 사업에 구조적으로 편입돼 근무했다고 인정한 것"이라며 "노란봉투법 시대에 '실질적 사용자'인 현대제철이 하청 노동자에 대한 사용자성을 부정하는 반론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정부의 의지다. 앞서 중노위가 이미 산업안전 등에 대해 교섭하라며 노동자들에게 파업권까지 부여했지만, 현대제철은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교섭에 응할 생각이 없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11월 서울고등법원(인천재판부)은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 2심에서 566명에 대해서는 정규직 고용 의무를 인정했지만, 324명에 대해서는 기각 판결을 내린 바 있어 사법부에서도 판단이 일부 나뉘는 점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
손잡고 윤 활동가는 "노동부가 적발만 하고 후속 조치를 못 한다면 1213명의 직고용 지시는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며 "이미 현행법 안에서도 교섭권을 확보한 현대제철, 한화오션, CJ대한통운 등 주요 사업장조차 테이블에 앉히지 못하면서 노란봉투법의 안착을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또한 "사측이 과태료를 내면서 버티는 이유는 불법 파견으로 아끼는 인건비가 과태료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라며 정부가 강력히 제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에 대해 노동부 관계자는 "당진제철소 규모가 커서 인원을 조사하느라 시간이 걸렸다"면서도 "불법 파견 판정과 노조법상 사용자성 인정은 별개의 법리라는 것이 현재 노동부의 해석 지침"이라고 신중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노동계는 이미 사법부와 중노위 모두 현대제철의 사용자성을 인정하는 판결과 결정을 잇달아 내놓고 있는 만큼, 노동부가 더 이상 중재자라는 핑계 뒤에 숨지 말고 행정력을 적극 행사하라고 촉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