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 후반에서 고착화하면서 고환율로 인한 경제적 부작용이 가시화하고 있다. 고환율이 수출 가격 경쟁력을 높여 성장을 견인할 수도 있지만,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은 모습이다. 오히려 달러 환산 소득을 갉아먹고 물가 상승을 부추기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에 기업과 '큰손' 투자자들의 달러 사재기와 해외 투자 쏠림까지 더해지며 우리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1일 국제통화기금(IMF)과 금융권에 따르면 고환율의 타격은 국가 경제 규모를 나타내는 지표에서부터 확인된다. IMF는 최근 연례협의 보고서를 통해 올해 한국의 달러화 기준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1조 8586억 달러에 그칠 것으로 추산했다. 이는 지난해보다 0.9%(168억 달러) 줄어든 규모다.
원화 기준으로는 명목 GDP가 2%대 성장이 예상되지만, 원·달러 환율 상승 폭이 이를 압도하면서 달러 환산 가치는 오히려 쪼그라든 것이다. 올해 1~11월 평균 환율이 달러당 1418원으로 지난해보다 4.0%나 뛴 탓이다.
이 같은 추세라면 'GDP 2조 달러' 진입은 물론, 이르면 내후년으로 기대됐던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달성 시점도 지연될 공산이 크다. IMF는 향후 한국 명목 GDP가 매년 4.1%씩 성장할 것이란 낙관적 시나리오를 제시했지만, 현재의 원화 약세 기조가 이어진다면 이 또한 장밋빛 전망에 그칠 수 있다. 구조적 저성장 국면 속에서 환율이 국가 경제 규모를 결정짓는 핵심 변수로 부상한 셈이다.
시차 두고 덮치는 물가 공포 우려도
고환율의 여파는 시차를 두고 실물 경제에도 타격을 줄 전망이다. 당장 내년 초부터 '물가 쇼크'가 우려된다. 수입 원자재 가격 상승이 시차를 두고 소비자 물가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통상 환율 상승이 3~6개월 뒤에 물가에 반영된다. 본격적으로 환율이 오르기 시작한 시점을 고려할 때 내년 초부터 물가에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한국개발연구원(KDI)과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환율이 1% 오를 때 소비자물가는 0.03~0.04%포인트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미 2%대 중반을 기록 중인 생활물가에 환율발 상승 압력이 더해질 경우, 실질 소득이 감소하는 가계, 특히 저소득층의 고통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역시 지난 27일 "환율이 1,400원을 넘어가면 금융 안정을 걱정하던 때와는 달리 지금은 외환 시장에 불안은 없다"면서도 "금융 안정의 문제가 아니고 고환율로 인해 물가가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은 우려가 된다"고 언급하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기업들의 수익성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한국의 수출 구조가 원자재와 중간재를 수입해 가공 후 수출하는 형태인 만큼, 고환율은 제조 원가 상승으로 직결될 수 있다.
환율 오르는데 달러 예금은 급증 '악순환'
연합뉴스불확실성이 커지자 경제 주체들은 원화 대신 달러를 움켜쥐고 있다. 통상 환율이 오르면 달러를 팔아 차익을 실현하던 과거 패턴과 달리, 추가 상승 기대감과 원화 약세에 대한 우려로 달러를 쌓아두는 '쟁여두기' 현상이 뚜렷하다.
5대 시중은행의 기업 달러 예금 잔액은 지난달 말 대비 21%나 급증하며 역대급 증가 폭을 기록했다. 기업들이 환차익 실현보다는 환율 변동성에 대비해 유동성 확보에 치중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자본 시장에서의 '코리아 엑소더스' 현상도 심화하고 있다. 개인 투자자(서학개미)뿐만 아니라 국민연금 등 일반정부의 해외 투자 확대가 환율 상승의 주요 요인으로 지목된다. 올해 국민연금의 해외 주식 투자는 전년 동기 대비 92%나 폭증했다.
이처럼 글로벌 강달러 국면에서 유독 원화와 엔화의 가치 하락 폭이 컸던 배경에는 대미 투자 부담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하반기 환율 상승세를 견인한 핵심 요인으로 대미 투자 협상과 관련된 대규모 자금 유출 우려가 지목된다. 여기에 외국인 투자자들의 국내 주식 순매도세까지 겹치며 원화 약세 압력을 가중시켰다는 평가다.
또한 한국 경제의 저성장, 고령화 등 구조적 한계를 회피하려는 움직임으로도 해석된다. 국내 자본 시장의 매력도가 떨어지면서 발생한 구조적 자본 유출이 다시 환율을 밀어 올리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현재의 고환율 상황을 일시적 현상이 아닌 '뉴노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원/달러 환율 '1500원 시대'가 도래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이에 맞춘 새로운 경제 모델 수립과 구조 개혁이 시급하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