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 등 소속 의원들이 발언 요청을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8월 말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나온 가장 핫한 뉴스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에서 야당을 대변할 새 얼굴이었다.
정기국회를 앞두고 출범한 '장동혁 지도부'는 나경원 의원을 법사위 간사로 전격 내정했다. 그간 상임위 간사직은 통상 재선급이 맡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원내대표까지 역임한 5선 중진을 앉힌 인선이 파격적이었던 이유다. 현장에서 만난 한 당직자는 "희생적 결단"이라고 했다. 선수(選數·선거에 당선된 횟수)만이 고려사항은 아니었겠으나, 나 의원도 처음에는 섭외를 고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내에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 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과 맞섰던 '추다르크', 더불어민주당 소속 추미애 법사위원장에 맞서기 위해선 그만한 거물급이 필요했다는 의미다. 판사 출신의 여야 중진들이 포진하면서, 법사위는 자연히 원내 최대 전장(戰場)이 됐다.
'추(秋)-나(羅) 대전'의 막이 오른 것이다.
다만, 전개 양상은 언론의 시나리오와 다르게 흘러갔다.
회기가 시작되고도 2주가 넘도록 나 의원의 신분은 '법사위 간사'가 아닌 '간사 내정자'에 머물렀다. 민주당이 선임안 상정 자체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내란 앞잡이' 공세도 뒤따랐다. 나 의원이 12·3 불법 비상계엄 당일에 윤 전 대통령과 통화한 유이(唯二)한 국민의힘 인사임을 비토 사유로 든 것이다. 민주당 서영교 의원은 지난 2일 법사위에서 간사 선임안 비토에 항의한 국민의힘 의원들을 가리켜 "윤석열 영장 공무집행을 방해했던 자들"이라고 했다. 고성과 삿대질, 퇴장으로 얼룩진 법사위의 모습은 육탄전만 없을 뿐, 흡사 '동물 국회'의 재현처럼 보였다.
급기야 16일 법사위에선 여당 주도로 나 의원 간사 선출을 위해 무기명 기표소가 등장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총투표수 10표 중 '부(否)' 10표로 부결. 투표 명단을 보면 쉽게 납득되는 결과다. 민주당 추미애·박지원·서영교·전현희·김용민·장경태·김기표·박균택 의원, 조국혁신당 박은정 의원, 최혁진 무소속 의원…. 표결에 반발한 국민의힘은 이미 회의장을 나선 뒤였다.
결과적으로 법사위 홈페이지상 야당 간사는 지금도 공란이다.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추미애 위원장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윤창원 기자일련의 촌극에서 두드러진 것은
166석 여당의 '나홀로 독주'다. 민주당은 그간 교섭단체의 자율이었던 상임위 간사 선임을 표결의 영역, 그것도 다수당의 재가가 있어야 통과가 가능한 사안인 것처럼 만들었다. 여야 간사가 협의로 안건을 정하고 조율하는
상임위 운영 절차를 아예 무시하겠다는 '선전포고'로 읽힌다는 뜻이다.
당사자인 나 의원은
"1반 반장을 뽑는데, 왜 2반 반원들이 뭐라고 하냐"고 했다. 또 "이번처럼 다수여당이 야당의 간사 선임을 수적 우위로 짓밟은 것은 유신정권에서도 없던 일"이라며 "여당이 야당의 간사를 직접 고르겠다는 것은 독재정권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라고 날을 세웠다.
여당 초선의원을 향해 "초선은 가만히 앉아 있어"라고 반말로 훈계한 나 의원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저,
민주주의 질서 안에선 어떤 의제라도, 필요한 형식과 절차를 갖춰야 한다는 원칙을 짚고 싶다.
실제로 추 위원장이 내세운 '나경원 4불가론'은 내용만 뜯어봤을 땐 시민 눈높이에서 터무니없는 주장이라 보기 힘들다. ①나 의원의 배우자가 피감기관인 춘천지방법원장이라서 이해충돌 소지가 있다는 점 ②'국회 패스트트랙 충돌' 관련 재판에서 나 의원이 실형(징역 2년)을 구형받은 점 ③나 의원이 '내란특검' 수사대상이란 점 ④국회 윤리위에 회부된 '초선' 발언 등이다.
하지만,
야권에서 나 의원 간사 내정을 두고 비슷한 우려를 표한 이들마저도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면? 분명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일 터다. 앞서 여야 원내지도부의 '특검법 합의안'이 반나절 만에 일방 파기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민의힘에선 계엄 이후 탄핵 찬반을 기준으로 갈라졌던 당이 모처럼 '단일대오'를 이루고 있다는 웃픈(우습지만 슬픈) 얘기도 들려온다. 지푸라기라도 당정과 싸울 명분이 필요한 야당에게 땔감을 던져준 여당의 '빅픽처'일까. '울고 싶은 아이'를 일부러 때려준 선의일까.
장동혁 대표가 영수회담에서 지적한 당정간 엇박자가 사실이 아니라면,
'더 많이 가진 쪽이 더 많이 양보하라'던 대통령의 당부가 실천으로 나타나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