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 유키 작가의 4·3아트 프로젝트 1부 뒤(裏). 고상현 기자▶ 글 싣는 순서 |
①살아남기 위해 일본으로…제주4·3 디아스포라의 비극 ②4·3 피해 목숨 건 일본 밀항…적발되면 공포의 수용소로 ③"죽을락 살락 일만"…고난 속 꿋꿋이 살아낸 4·3밀항인 ④日 차별과 혐오에…더불어 견디며 삶 도운 '제주공동체' ⑤국경 넘어선 4·3밀항인의 '고향 사랑'…제주 발전 토대 ⑥'남북분단 축소판' 재일제주인 사회…이산가족까지 ⑦"유령 같은 존재"…역사의 어둠 속 묻힌 제주4·3밀항인 ⑧끊이지 않는 혐오와 차별…몰이해와 무관심이 경계로 ⑨제주 4·3밀항인 기록 발굴…'절박감' '강요된 침묵' 드러나 ⑩어렵게 지켜낸 일본 4·3위령제…경계 뛰어넘은 추모행렬 ⑪4·3밀항인 다룬 연극과 미술작품…문화예술로 경계 넘다 (계속) |
"4·3광풍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 온 제주인의 여정을 반대로 가보려고 해요." 지난 19일 일본 오사카시 이쿠노구 코라이브즈파크에 마련된 '4·3 예술 프로젝트 - 거꾸로 달려 역사와 만나다' 전시실. 후지와라 유키(49)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설명했다. 수십 년 세월 입 밖에도 꺼내지 못했던 '밀항'은 이제는 각종 문화예술의 소재로 평화와 인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일본인 작가가 생각하는 '4·3밀항'
일본 돗토리현 출신인 후지와라 작가는 2016년 제주에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처음으로 4·3을 알았다. 학살 현장을 직접 봤을 때 "온몸으로 다가온 충격"이었다고 했다. 이후 제주인이 모여 사는 이쿠노구에서 희생자 유족과 연구자 얘기를 들으면서 4·3과 일본의 관계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4·3 이후 제주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좁은 배를 타고 몰래 일본으로 넘어온 사실을 듣고 놀랐어요. 일본인으로서 이 사건에 대해서 반응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이번 작품을 구상했어요."
그의 작품은 올해부터 3년에 걸쳐 이뤄지는 3부작이다. 제주인의 밀항 경로를 거슬러서 장소를 옮겨 진행된다. 올해 첫 시작은 최종 도착지 '이쿠노구'에서, 내년에는 밀항하다 적발되면 끌려갔던 오무라수용소가 있는 '나가사키'에서, 2027년에는 밀항의 원인인 4·3이 벌어졌던 '제주도'다.
다음달 25일까지 진행되는 1부 '뒤(裏)' 전시는 가로 5m, 세로 2.5m 크기의 벽 양쪽에 '1948. 4.3' 날짜를 홈을 팠다. 한쪽에는 캄캄한 곳에서 빛 때문에 '1948. 4.3'과 거꾸로 배열된 '3.4 8491'이 겹쳐 보인다. 다른 쪽에는 붉은 색 벽에 관람객이 동백꽃을 조각칼로 새기는 체험예술이다.
후지와라 유키. 고상현 기자"1부 전시는 일본인이 일본에서 제주도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만들었어요. 4·3이 동족 간 벌어진 비극인데, 일본에서 보면 뒷면으로 바라보는 느낌일 거예요. 그런데 제주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일본에서 살면 뒷면이면서 앞면이지 않을까요. 앞뒤를 섞어놓은 상황이 지금의 현실일 겁니다."
내년 진행되는 2부 '역(逆)'은 4·3 당시 밀항 온 제주인에 대한 응답으로 4·3에 대한 생각을 적은 종이를 병에 담아 바다에 띄워 제주로 보낸다. 3부 '반(反)'은 4·3의 계기인 항쟁의 역사를 상상하고 미군정 통치 상황을 암시하는 사탕을 녹여 4·3상징인 동백꽃 모형에 떨어트린 설치미술이다.
시와 연극, 영화까지…4·3밀항 다룬 작품
4·3밀항인의 역사는 수십 년 세월 어둠 속에 있었다. '밀항'의 성격상 일본에서조차 터놓고 얘기할 수 없었다. 특히 4·3을 얘기할 때 재일제주인의 목소리는 소외됐다. 하지만 최근 들어 후지와라 작가처럼 국적을 뛰어넘어 4·3밀항인을 다루는 연극과 미술 등 예술작품이 많이 발표되고 있다.
지난해 4월 제주아트센터에서 진행된 재일극단 달오름의 연극 '바람의소리'가 호평을 받았다. 일본 간사이연극대상을 받은 이 작품은 재일동포와 일본인 배우들이 4·3을 피해 밀항한 쌍둥이 자매를 연기했다. 4·3과 남북분단으로 이어지는 재일제주인의 굴곡진 삶을 연대기 형식으로 표현했다.
4·3 당시 밀항한 후 일본 문학계에서 존경받는 예술가가 된 재일제주인 김시종(96) 시인의 인생 역정을 다룬 '연극, 김시종' 작품이 일본과 제주에서 공연되며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23년 11월 일본에서 진행된 '연극, 김시종' 공연. 오카자키 료코 제공
특히 재작년 대종상 영화제 다큐멘터리상 등 각종 영화제 상을 받은 양영희 감독의 '수프와 이데올로기'도 4·3을 피해 일본 오사카로 밀항 온 어머니 강정희 씨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는 4·3뿐만 아니라 남북분단의 아픔을 겪은 한 재일제주인 가족의 이야기를 다뤄 큰 울림을 줬다.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은 "4·3 하면 제주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재일제주인 김시종 시인의 시가 번역돼서 소개도 되는 등 4·3밀항인에 대해 많은 사람이 관심 갖게 된 거 같아요. 문화와 예술이 갖고 있는 힘이 커요. 그동안 부족했던 진상조사 내용이 채워져 나가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현재 후지와라 작가의 4·3 예술 프로젝트 1부 '뒤(裏)' 전시실 한편에는 내년에 진행될 2부 '역(逆)' 작업이 한창이다. 4·3에 대한 생각을 적은 종이를 병에 담아 바다에 띄워 제주로 보내는 작업이다. 제일 먼저 쓴 오광현 재일본4·3희생자유족회장의 아직 부치지 못한 편지가 눈에 띄었다.
'일본에 있는 제주인이 한걸음이라도 4·3을 통해 자기 뿌리를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억이 4·3의 정신인 평화와 인권을 만들어내는 데 하나가 되길 원합니다.'
오광현 재일본 4·3희생자유족회장이 쓴 편지. 고상현 기자※제주CBS는 이번 보도와 기획보도에 그치지 않고 4·3밀항인 관련 기록이 추가로 발굴되거나 새로운 사실이 드러날 때마다 보도하겠습니다. 어둠 속 묻힌 역사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