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방 면제 탄원 심사 과정에서 제출된 탄원서(사진 왼쪽)와 일본 경찰 보고서. 최덕효 조교수 제공▶ 글 싣는 순서 |
①살아남기 위해 일본으로…제주4·3 디아스포라의 비극 ②4·3 피해 목숨 건 일본 밀항…적발되면 공포의 수용소로 ③"죽을락 살락 일만"…고난 속 꿋꿋이 살아낸 4·3밀항인 ④日 차별과 혐오에…더불어 견디며 삶 도운 '제주공동체' ⑤국경 넘어선 4·3밀항인의 '고향 사랑'…제주 발전 토대 ⑥'남북분단 축소판' 재일제주인 사회…이산가족까지 ⑦"유령 같은 존재"…역사의 어둠 속 묻힌 제주4·3밀항인 ⑧끊이지 않는 혐오와 차별…몰이해와 무관심이 경계로 ⑨제주 4·3밀항인 기록 발굴…'절박감' '강요된 침묵' 드러나 (계속) |
'1948년 4·3 발생 이후에 일본에 왔다는 사람들의 말은 거의 거짓말일 것이다.' 지난 2003년 정부에서 펴낸 '4·3진상조사보고서'에는 밀항인과 관련해 재일제주인 지식인 김민주 씨의 말만 인용하고 설명이 없다. 하지만 4·3 직후 밀항한 사람의 증언은 재일제주인 김시종(94) 시인을 비롯해 무수히 많다. 이런 가운데 취재진은 증언을 뒷받침할 기록 자료를 입수했다.
'밀항인 추방 면제 탄원' 문서 발굴
재일동포 3세인 영국 셰필드대학교 동아시아학과 최덕효 조교수는 지난 20일 제주시 한 호텔 카페에서 취재진과 만나 미국 국립공문서관 소장 자료인 '추방 면제 탄원' 문서를 제공했다. 최 조교수는 일본 국회도서관 미군 331문서철에서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하고 있는 것을 발굴했다.
그가 확보한 '추방 면제 탄원' 문서에는 일본에서 밀항하다 적발된 조선인 가족의 탄원서와 일본 경찰 조사보고서, 연합국 최고 사령부(GHQ) 내부 심사, 최종 결정 내용이 담겨 있다.
일제 패망 후 점령군인 GHQ는 한번 귀환한 한국인의 일본으로의 재도항을 금지했다. 특히 4·3 당시 이승만 정부가 제주 해안을 봉쇄한 터라 도민들은 목숨을 걸고 밀항할 수밖에 없었다. 1952년 일본이 독립한 뒤에도 유지되다 1965년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면서야 차츰 풀리기 시작했다.
영국 셰필드대 동아시아학과 최덕효 조교수. 고상현 기자밀항하다 적발되면 하리오수용소(후에 오무라수용소로 변경)로 보내지는데 당시 GHQ는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가족의 탄원서와 일본 경찰 조사 보고서 등을 검토해 '석방' 또는 '추방' 결정을 내렸다. 탄원서 접수 이후 지방 민사국, 민사국, 참모 제2부, 참모 제1부 심사 과정을 거쳤다.
최 조교수가 발굴한 '추방 면제 탄원' 문서에는 4·3과 한국전쟁 시기인 1949년 10월부터 1951년 5월까지 일본으로 밀항하다 적발된 조선인 271명에 대한 사례가 담겨 있다. 이 중 제주인은 13명이다. 이들 가족의 일부 탄원서에는 4·3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한 사정을 엿볼 수 있다.
밀항인의 절박감…'강요된 침묵'도
'추방 면제 탄원 문서' 중 제주 출신자 13명의 경우 탄원인 대부분이 일제강점기부터 '일본 속 작은 제주'라 불렸던 오사카시에 사는 아버지, 남편, 남동생, 오빠 등의 가족이다. 4·3 당시 도민 상당수가 밀항의 최종 도착지로 이전에 살았던 경험이 있거나 가족이 사는 오사카를 택했다.
1950년 4월 25일 일본 대마도에서 적발된 'Gen○○'씨의 경우 일본에 거주하는 오빠가 쓴 탄원서에는 '부모가 1948년 4월 제주도의 정치적 동란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나와 있다. 일본에 살다 해방 후 부모를 보살피기 위해 제주에 왔지만 4·3으로 부모가 숨지며 밀항했다는 내용이다.
4·3밀항인 신원 정보가 담긴 일본 경찰 보고서. 직업과 적발 장소와 일시, 이유 등이 적혀 있다. 밀항 이유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정치적 무장봉기 때문에 부모가 죽었다'고 나와 있다. 최덕효 조교수 제공 일본에서 살다 1946년 남편과 함께 제주에 온 'Ko○○' 세 가족(엄마·아들·딸)은 4·3 당시 남편을 잃고 1950년 7월 다시 일본으로 밀항하다 적발됐다. 지방 민사국과 민사국 모두 석방 결정을 내렸지만, 제주에서 숨진 남편의 신원 정보를 확인한 후 최종적으로 추방 결정이 내려졌다.
특히 4·3으로 밀항한 제주 출신자 대부분 추방 결정이 내려질까 봐 군·경 토벌대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당시 GHQ는 심사 과정에서 경제적인 상황, 정치적 이념 등을 중요하게 따졌다. 행여나 군·경 토벌대 얘기를 하면 이념 문제로 추방되기 때문이다. '강요된 침묵'이 작용한 것이다.
19살의 나이에 오사카에 사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밀항한 'Kin○○'의 경우 '남한으로 추방되면 공산당 영향을 받으니깐 추방하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14살에 일본으로 밀항한 'Fu○○' 탄원서에는 '제주도 사건 당시 삼촌이 공산당 게릴라에 죽임을 당했다'고 적혀 있다.
최덕호 조교수는 "당시 냉전 상황이었고 GHQ가 밀항인 또는 탄원인의 정치적 성향을 엄격하게 따졌다. 4·3밀항인의 경우 밀항 이유로 군·경 피해를 얘기하면 추방될 수 있기 때문에 하지 않았다. 이번 자료를 토대로 실제로 제주에서 어떤 피해가 있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오무라수용소에 갇힌 조선인. 어린이 모습도 보인다. 전갑생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 제공"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자료들 많아"
이번 문서에는 냉전 시기 GHQ와 일본 당국의 '난민'에 대한 인식도 엿볼 수 있다. 4·3난민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난민에 대해서는 인도적 고려보다는 추방 결정을 내리는 경향을 보였다.
최 조교수가 '추방 면제 탄원'에 나타난 271명에 대해서 한국전쟁 이전과 이후의 체류 허가와 불허가 비율을 분석한 결과 한국전쟁 이전에는 체류 허가 결정이 61명, 불허가는 5명에 그쳤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에는 체류허가 56명, 불허가 86명으로 불허가 비율이 월등하게 높았다.
그는 "한국전쟁 직후 몇 개월 동안 난민에 대해서는 수용소에 사실상 가뒀다. 수용소 생활이 열악했던 터라 붙잡힌 사람들이 차라리 한국으로 추방해달라고 할 정도였다. 냉전 시기 이념 문제로 난민으로 보호받는 게 아니라 일본에 오면 수감되고 추방되는 일이 벌어졌다"고 지적했다.
최 조교수는 이번 추방 면제 탄원 자료 발굴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지금도 미국 국립공문서관과 일본 국회도서관에는 먼지에 싸인 4·3밀항인 관련 자료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재일제주인에 대한 4·3 피해 조사는 그동안 구술에 의존한 측면이 있다. 아직 발굴되지 못한 밀항인 기록이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4·3연구자들의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기록 발굴과 함께 제주에서 확인 작업까지 이뤄지면 4·3밀항인 역사를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미국 국립문서관리청 영상자료 캡처. 1949년 3월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한 '다치바나 마루' 여객선 승객들이 나란히 앉아 있다. 강제 추방되는 도민들도 포함돼 있다. 전갑생 연구원 제공※제주CBS는 이번 보도와 기획보도에 그치지 않고 4·3밀항인 관련 기록이 추가로 발굴되거나 새로운 사실이 드러날 때마다 보도하겠습니다. 어둠 속 묻힌 역사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