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층을 타깃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 '퇴마록' '미스터 로봇'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 포스터. ㈜쇼박스, NEW 제공'마당을 나온 암탉'(2011년, 222만 2935명) '사랑의 하츄핑'(2024년, 124만 130명)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2012년, 104만 636명) '뽀로로 극장판: 슈퍼썰매 대모험'(2013년, 92만 9985명) '신비아파트 극장판: 하늘도깨비 대 요르문간드'(2019년, 89만 3221명).
2011년 '마당을 나온 암탉'이 200만 관객을 넘으며 한국 역대 애니메이션 박스오피스 1위라는 진기록을 세운 후 14년이 지나도록 깨지지 않고 있다. 역대 국내 애니메이션 중 100만 관객을 넘어선 작품은 단 3편에 불과하다. 지난해 '사랑의 하츄핑'이 100만 관객을 넘은 것 역시 2012년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 이후 12년 만이다.
그나마도 유·아동을 겨냥한 가족 단위 애니메이션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을 뿐, '성인'을 타깃으로 한 국내 애니메이션은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애니메이션 강국으로 불리는 미국과 일본 작품은 국내에서 제대로 기세를 떨쳤다. 2023년 '엘리멘탈'(美, 723만 8453명, 3위) '스즈메의 문단속'(日, 557만 4358명, 4위) '더 퍼스트 슬램덩크'(日, 478만 6406명, 6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美, 239만 5519명, 13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日, 200만 9398명, 15위) 등 미국과 일본 작품이 메가 히트를 기록했다. 2024년에도 '인사이드 아웃2'(美, 879만 9013, 3위) '모아나2'(美, 337만 2815명, 7위) '쿵푸팬더4'(美, 177만 1738명, 17위) 등 미국 작품이 국내 시장을 휩쓸었다.
2023년과 2024년 국내에서 흥행한 외국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 '더 퍼스트 슬램덩크'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엘리멘탈' '인사이드 아웃2' '모아나2' 포스터. 각 배급사 제공 왜 韓 애니메이션은 극장에서 외면받을까
"해외는 다양한 연령이 볼 수 있는 작품이 만들어져 있는데 국산은 진짜 한정적이란 느낌이 강하거든요."(20~30대 여성)
"'겨울왕국'도 어른이 봐서 시시하다 느낌 안 들거든요. 애들은 너무 좋아하고. 그런 타깃의 작품도 필요해요. 그런 부분은 기술력, 스토리가 받쳐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20~30대 남성) 극장판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객들의 수요는 존재한다. 그러나 대부분 미국, 일본 등 외국 애니메이션 관객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2024 애니메이션 이용자 조사'(2023년 6월~2024년 5월/전국 만 10~69세 애니메이션 콘텐츠 이용자 대상)에 따르면 최근 1년간 극장에서 본 애니메이션 작품이 '외국산 애니메이션'이라는 응답이 63.6%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뒤를 이어 '국산/외국산 애니메이션 모두 보았다'(18.7%) '국산 애니메이션'(10.0%)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국산 애니메이션을 관람하지 않은 이유는 '대부분 유아용 애니메이션이라서'(43.5%)와 '외국산보다 재미없어서'(43.4%)가 비슷하게 나타났다. '대부분 유아용 애니메이션이라서' 관람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여성' '30대'에서 상대적으로 높았고, '외국산보다 재미없어서'라는 응답은 '남성' '20대 이하'에서 상대적으로 높았다.
조사 결과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산 애니메이션은 대다수가 영·유아를 타깃으로 하고 있다는 인식이 강하게 나타났다. 영·유아 외 대상 애니메이션의 경우에도 스토리나 그림체가 미흡하거나 비주류의 장르로 대중성이 떨어진다는 부정적 인식이 높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 '2024 애니메이션 이용자 조사' 캡처 실사에 비해 낮은 기대치…익숙한 IP로 성인층 공략
해외 애니메이션처럼 영·유아 외 주 소비층인 청소년을 포함해 성인을 타깃으로 하는 작품이 필요하지만, 녹록지 않은 국내 시장이 문제다. 가뜩이나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이 어려운 상황에서 영·유아 외 15세 이상 청·장년층을 타깃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더군다나 실사 영화와 비교해 성인을 타깃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의 제작·투자 배급이 어렵다는 점은 애니메이션 활성화에 있어 장벽으로 작용한다.
올해 성인 타깃 애니메이션 '미스터 로봇'과 '나쁜 계집애: 달려라 하니' 배급을 준비 중인 NEW 유통전략팀 김민선 과장은 "국내 성인 관객층이 한국 애니메이션 극장판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어려움"이라며 "영화는 경험재이기 때문에 사전 기대감 형성이 중요한데, 한국 애니메이션에 대해 상대적으로 기대치가 낮은 것이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보통 실사 영화가 배우 캐스팅과 연출자의 명성에 따라 사전 인지도가 확보되고, 입소문으로 이어지는 데 반해 애니메이션은 오롯이 작품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점 역시 문제다. 결국 '인지도'가 극장 배급과 흥행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실제로 애니메이션 흥행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작품은 TV 시리즈 또는 유튜브 등의 온라인 플랫폼에서 캐릭터의 인지도를 쌓은 '사랑의 하츄핑'과 만화·시리즈를 통해 팬덤을 쌓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처럼 이미 잘 알려진 IP(지식재산권)이거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나 '엘리멘탈' '인사이드 아웃2' 등 유명 감독 및 메이저 제작사의 작품이다.

지난해 '사랑의 하츄핑'에 이어 올해 '퇴마록'을 배급하며 성인층 공략에 나선 배급사 쇼박스 홍보팀 조수빈 팀장은 "애니메이션 장르의 경우 디즈니, 지브리 등 미국과 일본 애니메이션처럼 제작 스튜디오가 가진 인지도가 중요하다"라며 "한국 애니메이션의 경우 시장 전체 규모나 역사가 아직 미국이나 일본에 견주어 크지 않다 보니 상대적으로 개봉 전 극장 영화로 인지도를 쌓기 위해서는 원작 IP의 여부나 팬덤에 의존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퇴마록'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원작 IP의 인기와 원작 팬의 존재가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퇴마록'의 원작 소설 <퇴마록>(작가 이우혁)은 'K-오컬트의 바이블'로 불리는 작품으로, 누적 판매 부수 1000만 부를 기록하는 등 충성도 높은 팬덤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국내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대부분 유아용 애니메이션'이고 '외국산보다 재미없어서' 보지 않는 20~40대다. 실제로 '퇴마록'의 연령별 예매 분포를 살펴보면 △20대 17% △30대 35% △40대 30%(CGV 제공, 3월 10일 기준)로 나타났다.
조수빈 팀장은 "'퇴마록'의 경우 원작 IP가 가진 힘이 워낙 크다. '퇴마록'은 강력한 원작 IP를 바탕으로, 당시의 기억을 가진 팬들이 만족할 만한 작품이자 추억을 소환할 수 있는 작품"이라며 "또, 극장에서 보기 좋은 시원하고 타격감 있는 액션 스케일, 원작을 충실히 따라가면서도 개성 있는 캐릭터, 장르적으로 확실한 매력이 있어서 설령 원작을 모르더라도 작품 자체만으로도 매력을 느낄 수요가 있다고 봤다"라고 말했다.
'나쁜 계집애: 달려라 하니' 역시 오랜 시간 사랑받은 IP라는 점에서 성인 관객들에게 소구할 수 있다. 김민선 과장은 "어렸을 적 만화 잡지와 TV 애니메이션으로 접했던 작품을 극장의 대형 스크린으로 다시 만나는 특별한 추억이 되리라 생각한다"라며 "원작 팬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 속 새로운 시점을 제공하고, MZ 관객에게는 입체적이고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라고 밝혔다.
중국 애니메이션 '너자2' 포스터. IMDb 캡처 성인 타깃 애니 활성화 위해 필요한 '지원'
'스즈메의 문단속'과 '더 퍼스트 슬램덩크' 등의 성공은 국내 시장에 12세 이상 애니메이션은 흥행에 성공하기 어렵다는 공식이 깨졌다는 것을 알렸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2023년 극장용 애니메이션 흥행 순위를 살펴보면 △12세 이상 관람가 3편 △15세 이상 관람가 1편 △전체관람가 6편이다. 전체관람가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등 전 세대를 아울러서 볼 수 있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콘진원은 "이는 전 연령대를 아우를 수 있는 애니메이션 작품이 등장할 필요성을 시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라며 "2023년의 박스오피스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천만 관객 돌파 등을 놓고 본다면, 관객이 애니메이션이어서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따라 충분히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이러한 부분을 극복한다면, 극장에서 충분히 관객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퇴마록'을 통해 성인 타깃 애니메이션 제작에 도전한 제작사 로커스 홍성호 대표는 성인을 타깃으로 한 국내 애니메이션이 글로벌 시장에서도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깊이 있는 서사와 정서적 공감을 제공할 수 있는 양질의 애니메이션 제작과 공급이 지속해서 이뤄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경쟁력 있는 원천 IP의 발굴과 적극적인 개발과 기술적 완성도, 스토리텔링의 차별화가 동반되어야 한다. 또한 콘텐츠 제작 외에도 전략적 마케팅, 글로벌 유통, 사업으로 확장될 수 있도록 지속적 유통과 상영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절실한 건 정부의 지원이다.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대표적인 사례가 애니메이션 변방으로 취급됐던 중국이다.
최근 중국 토종 애니메이션 '너자2'는 미국와 일본이 양분한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개봉 19일 만에 디즈니 '라이온킹'의 기록을 깨고 세계 박스오피스 10위권에 오르는 등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 같은 흥행에 자신감을 얻은 '너자2'는 호주, 미국, 캐나다 등 해외로 뻗어 나갔다.
애니메이션 '퇴마록' 스틸컷. ㈜쇼박스 제공'너자2'의 흥행은 15억 인구 중국의 커다란 내수시장도 영향을 미쳤지만,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간한 '중국 애니메이션영화의 발전과정과 흥행 동향'에 따르면 지난 2015년 '신서유기: 몽키킹의 부활'은 성인 관객층을 노리며 흥행에 성공했고, 이를 시작으로 중국 애니메이션영화업계는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영화 굴기'(动漫崛起)를 시작했다.
중앙정부의 주도 아래 중국국가광파전시총국, 중화인민공화국문화여행부, 국가판권국, 국가지식재산권국 등 관련 기관과 단체에서는 애니메이션을 대대적으로 육성하는 정책을 수립해 시행하고 있다. 중국미디어그룹과 저장성 인민정부가 공동 주최하는 중국 국제만화 애니메이션 페스티벌(CICAF)을 통해 산업 발전을 촉진하고 국제적 문화 교류를 장려하고 있다.
이처럼 정부의 육성 정책과 빠르게 성장하는 온라인 플랫폼으로 인해 2023년 중국의 애니메이션 시장은 240억 달러 규모의 거대한 시장으로 성장했다.
홍성호 대표는 "한국에서도 애니메이션 산업에 대한 제작 지원금, 인프라 조성, 해외 배급 지원 등 체계적인 지원 정책이 필요하다"라며 "특히, 성인 타깃 애니메이션은 유·아동보다 더 높은 제작비와 긴 제작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속해서 프로젝트를 이어갈 수 있도록 안정적인 펀딩과 투자 유치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 지원의 방식에 전환이 필요하다. 현재 국내 지원 방식은 주로 경쟁방식인데, 이러한 방식은 안정적인 콘텐츠 제작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또한, 지원을 받은 작품의 완성을 보장하지 못한다"라고 현 정책의 한계점을 지적했다.
홍 대표는 "이미 해외 52개 국가가 콘텐츠 제작을 완료했을 때 제작비 일부를 돌려주는 '리펀드 방식'으로 지원해 결과물의 양과 질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라며 "국내 역시 제작사가 안정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도록 리펀드 방식으로 정책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