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섹션 초청작 다큐멘터리 영화 '마지막 해녀들' 수 킴 감독. 애플TV+ 제공※ 스포일러 주의 해녀(海女, sea women). 사전에서는 해녀를 '공기탱크 없이 바닷속으로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성'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해녀들의 삶을 지근거리에서 관찰한 수 킴 감독은 이렇게 재정의했다. '걸크러시' '독립성' '강인함'.
한국계 미국인 수 킴 감독은 8살 때 가족과 함께한 제주도 여행에서 해녀 문화를 처음 접한 이후 곧바로 사랑에 빠졌다. "대담하며 두려움이 없고, 확신에 가득 찬, 다른 버전의 한국 여성성"에 매료된 것이다. 이후 성인이 되어 다시 제주도를 방문한 감독은 84세 해녀로부터 "아무래도 우리가 '마지막 세대'가 된 것 같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정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해녀들을 기록하기로 했다.
그러나 제작에 들어가기까지 순탄치 않았다. 미국 내 수많은 제작사를 찾았지만, 선뜻 손을 내밀어주는 곳은 없었다. 그러던 중 최연소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여성 교육 운동가인 말랄라 유사프자이가 설립한 제작사 엑스트라커리큘러의 연락을 받게 됐다. 유사프제이와의 협업이 성사되며 A24와 애플TV+까지 합류하게 됐다.
수 킴 감독은 "말랄라와 함께 일하게 된 건 선물 같은 일이다 그분이 없었다면 우리 영화는 존재할 수 없었다"라고 감사를 표했다.
우여곡절 끝에 촬영에 들어간 수 킴 감독이 만난 해녀들은 결코 그들의 삶을 고되다고만 하지 않았다. "바다에 가면 매일같이 신난다"(박인숙 해녀)라며 웃는 여성들. 그게 바로 수 킴 감독이 만난 진짜 해녀였다.
지난 3일 부산 해운대구 영상산업센터에서 열린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 초청작 애플TV+ 다큐멘터리 영화 '마지막 해녀들'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수 킴 감독과 강주화, 정영애, 박인숙, 한인홍 해녀는 제주 해녀의 참모습과 현실을 알렸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섹션 초청작 다큐멘터리 영화 '마지막 해녀들' 수 킴 감독. 애플TV+ 제공 '해녀'를 재정의하다
여성들이 직업을 갖는 것조차 어려웠던 시절, 해녀들은 오직 자신의 맨 숨만으로 바다 깊은 곳에 잠수해 물건(*참고: 제주도 해녀는 바다에서 구할 수 있는 해산물을 '물건'이라고 표현한다)을 수확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수 킴 감독은 그들의 모습을 두고 "다른 버전의 한국 여성성"이라고 표현했다.
그들의 모습은 어린 감독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또한 수 킴 감독이 해녀들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건 해녀 공동체가 가진 모습 때문이었다. 웃고 떠들다가도 때때로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즐거워했다. 수 킴 감독은 '해녀'를 "해녀는 시끌벅적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걸크러시 집단"으로 기억했다.
자신의 삶과 바다를 사랑하는 해녀들의 모습은 기자간담회 현장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기자간담회 마지막, 해녀들은 다 같이 '이어도사나'를 노래했다. '이어도사나'는 "해녀들이 물질하러 갈 때, 힘을 다해서 노를 젓는 노래"(정영애 해녀)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섹션 초청작 다큐멘터리 영화 '마지막 해녀들' 수 킴 감독과 해녀들. 애플TV+ 제공웃으며 '이어도사나'를 합창하는 해녀들의 모습은 보통의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힘들고 불행한 해녀'와는 거리가 멀었다. 수 킴 감독은 "뉴스 속 해녀와 달리 내 경험 속 해녀들은 자신들의 일을 굉장히 기뻐하고 즐겼다. 이를 영화에 담는 게 소기의 의도였다"라고 설명했다.
어린 기억 속 멋지게 기억됐던 제주 해녀들은 여전했다. 그들은 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용감하고 유머러스했다. 수 킴 감독에게 '해녀'는 사전적이고 기술적인 의미를 넘어 특별한 단어로 다가왔다.
"해녀는 아시아에서 일하는 여성의 첫 세대라고 생각해요. 100년 전만 해도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게 어려웠어요. 그러나 해녀들은 여성으로서 직업을 가졌을 뿐 아니라 제주를 반(半)모계 사회로 만드는 데 공헌했죠. 기술적인 의미도 있지만, 해녀는 그 이상으로 여성의 힘, 권위 신장, 경제적 독립성 등 모든 걸 함의하는 단어라고 생각해요." _수 킴 감독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섹션 초청작 다큐멘터리 영화 '마지막 해녀들' 스틸컷. 애플TV+ 제공 깨끗한 바다 위해 앞장선 해녀 공동체
'마지막 해녀들'에는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했던 해녀들의 삶은 물론 나이를 떠나 '해녀'라는 공동체 아래 연대하는 이들의 모습을 그린다. 해녀들의 공동체 의식은 해양 보존을 위해 한뜻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감독은 "자신들의 공동체 의식이 확대된 것"이라고 말했다.
해녀들은 바다를 통해 삶을 이어가는 만큼, 바다의 변화를 가장 먼저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해양 쓰레기와 기후변화는 바다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특히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방류하며 안전을 강조했지만, 해녀들에게는 부작용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인홍 해녀는 "37살에 물질을 시작해 37년을 해왔는데, 그때는 오염이 되지 않을 때라 바다에는 소라, 전복, 문어가 엄청 많았다"라며 "그러나 지금은 (바다가) 오염되어 물건이 없다. 소라가 다 죽어서 엎어져 있다. 오염수가 원인인 거 같다"라고 토로했다.
제주 해녀들은 지금도 오염수 방류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다. 72세 장순덕 해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UN사무국에 직접 찾아가 "우리를 마지막 해녀로 만들지 말라"라며 연설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생계가 위협받기 때문만은 아니다. 바다에서 살며 바다를 통해 삶을 이어온 사람으로서 후손들에게 깨끗한 바다를 물려줘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감독은 "깨끗한 물을 젊은 세대에게도 남겨 줘야 한다는 배려심이 공동체 안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섹션 초청작 다큐멘터리 영화 '마지막 해녀들' 스틸컷. 애플TV+ 제공 "다시 태어나도 물질할 것"
해양 오염과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외에도 해녀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또 다른 문제는 바로 '현실'이다.
유네스코는 오랜 세월 이어 온 제주해녀문화의 가치와 보전의 필요성을 인정해 지난 2016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그러나 여전히 지원이나 복지 혜택은 열악했다. 강주화 해녀는 물질 도중 사고를 당해 부상을 당한 이후 같은 해녀들의 도움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강주화 해녀는 "해녀는 위험한 직종이라 보험 가입이 안 된다. 수협에서 보험을 들어주지만, 해녀는 다쳐도 돈 10원도 안 나오고, 죽어야만 돈이 나온다"라며 "해녀가 다치면 보상도 해줘야지 유네스코만 등재하면 뭐하나. 죽으면 끝인데"라고 토로했다.
해녀들은 해가 갈수록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1960년대 3만 명에 달했던 제주도 해녀는 이제는 4000(2023년 기준)도 안 될 정도로 얼마 남지 않았다. 자신이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84세 해녀의 말이 머지않은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
여기에 해양 오염은 악화하고,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까지 더해지며 제주 바다와 해녀들의 삶은 더욱더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해녀들'에서 보여준 것처럼, 해녀의 삶과 바다를 사랑하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바다는 천국이에요. 잊지 마세요." _한인홍 해녀
"전 다시 태어나도 물질을 할 거예요." _박인숙 해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