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행복의 나라' 추창민 감독. NEW 제공※ 스포일러 주의 역사에서 사라진 채 숨겨진 이야기로 남았던 한 줄을 수면 위로 끄집어 낸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추창민 감독이 이번엔 10·26 사건과 12·12 군사 반란 사이 우리가 몰랐던 시간을 포착했다.
모두가 다 아는, 그리고 여러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잘 알려진 10·26 사건과 12·12 군사 반란 사이에는 '쪽지 재판' '졸속 재판'으로 불렸던 재판이 있다. 10·26 사건 이후 수사, 기소, 심리, 사형 구형까지 걸린 기간은 54일에 불과하다. 그사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빈틈을 추창민 감독은 영화적 상상력을 메워 넣었다. 그렇게 추 감독이 소환한 '시대'의 이야기가 '행복의 나라'에 담겼다.
추 감독은 영화 속 배경이 된 당시를 "야만의 시대"라고 표현했다. 기나긴 유신 독재 정권이 사라지자 그 자리를 차지한 건 폭력적인 정권이었다. 권력을 잡기 위해 폭력을 자행한 권력자, 권력자에 대항해 할 말을 다 한 변호사, 그리고 역사의 변곡점에서 희생된 군인이 살았던 시대와 그들을 조명하며 과거를 되짚어보고 현재를 다시 보고자 했다. 과연 추 감독은 이 야만의 시대를 누구를 통해 어떻게 보여주고자 했을까.
영화 '행복의 나라' 스틸컷. NEW 제공 '행복의 나라'라는 시대의 메타포
▷ 10·26 사건이라고 하면 누구나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행복의 나라'는 김재규 부장이 아닌 박흥주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관을 조명하고 있다. 10·26 사건과 12·12 군사 반란을 다룬 이야기는 많다. 그사이 이야기를 한 건, 주요 사건을 다루면 '사건'이 중심이 되지만 숨겨진 이야기니까 '시대'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도 그 시대성을 어떻게 부여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전상두(유재명)라는, 전두환으로 치환될 수 있는 인물, 야만의 시대에 자기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대한민국을 집어삼킨 인물을 하나의 권력, 욕망으로 선택하게 됐다. 정인후(조정석)는 시민 정신으로, 박태주(이선균)는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그 사람들, 그 사건을 가져온 이유는 시대로 치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행복의 나라' 속 인물들은 좀 더 메타포가 담겼다.
▷ 박흥주 대령을 모티프로 한 박태주는 실제 인물이 가진 것보다 많이 덜어낸 것 같다. 미화시켜서도 안 되고, 또 박흥주라는 사람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개인 서사를 정서적으로 갖고 오는 순간, 그 개인의 이야기가 되어버리면서 내가 생각한 맥락이 틀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좀 더 객관화시키고, 정서적으로 덜어냈다.
영화 '행복의 나라' 스틸컷. NEW 제공 평범한 시민이 투사로, 평범한 군인이 악으로
▷ 정인후는 처음에는 속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정의롭게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박태주의 변호를 맡고 사건들을 겪으면서 점차 변화하고 성장한다. 처음부터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인 건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속물적인 인간이 변해가는 과정을 그리게 됐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역시 변해가는 과정을 보면 드라마틱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예를 들면, 자식을 잃거나 다친 부모님들의 집단을 만나 보면 처음부터 투사가 된 게 아니고 하다 보니 세상을 알게 되며 투사가 된 거다.
정인후도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훌륭한 인물은 아니다. 시작은 아버지를 감옥에서 구하고 싶어서 혹은 출세하고 싶어서지만, 점점 상황을 맞닥뜨리며 변해간다. 우리들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인간이다. 정인후의 성장이 나에겐 더 중요했다. 마지막에 박태주가 정인후를 향해 "좋은 변호사"라고 말해준 이유도 성장했다는 의미다. 그게 나한테는 중요한 키워드였다.
영화 '행복의 나라' 스틸컷. NEW 제공 ▷ 앞서 '행복의 나라' 속 캐릭터들은 시대에 대한 메타포를 담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쿠데타로 권력의 가장 높은 곳에 선 전상두는 어떻게 표현하고 싶었나? 전상두를 전두환씨로 볼 수도 있겠지만, '시대의 야만성'으로 본다면 훨씬 더 포괄적이어야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두환씨에 대해 가진 생각들이 있다. 돌직구적이고 폭력적이라는 거다. 난 인간이란 외형적으로 드러난 것과 내면이 다를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49:51 정도라면 몰라도 누구나 어떤 한 성향이 8~90%를 차지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의 야만성은 저렇게 폭력성일 수도 있지만, 그 뒤에 야비함과 치밀함이 숨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 영화를 만들기 전에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저자 한나 아렌트)를 봤다. 실질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악은 악마처럼 보이지 않고 오히려 평범하다. 나도 악을 이렇게 구성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화 '행복의 나라' 스틸컷. NEW 제공 권력을 향해 외쳤던 시민 정신
▷ 골프장에서도 정인후는 전상두를 향해 용기 있게 할 말을 다 한다. 특히 "왕이 되고 싶으면 왕을 해. 돈이 갖고 싶으면 대한민국 돈 다 가져. 대신, 대신에 사람은 죽이지 마"라는 대사는 인상적이었다. 난 당시에도 불의에 항거하고 독재에 목소리 냈던 수많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인후가 그 시대에 골프장을 찾아가서 이야기한 이유는 개인이자 변호사가 장군을 찾아간 게 아니라 권력자를 향해, 세상을 향해 수많은 시민 정신이 외쳤던 소리라고 생각한다.
▷ 그 장소가 골프장이었던 이유가 있나? 자료 조사를 하니 전두환씨가 골프를 좋아했고, 12·12가 끝난 이후 미군 골프장을 좋아했다고 하더라. 그 골프장은 성역인데, 성역에 가서 혼자 골프를 친 거다. 전상두는 머리도 좋고, 전면에서는 점잖게 보여도 뒤에서는 수많은 비수를 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비수가 드러나는 것은 개인적인 공간이고, 그래서 골프장이었다. 사람들과 있을 때는 군인 정신을 이야기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낼 때는 개인적인 공간에서 드러내지 않았을까.
또 실제 전두환씨가 골프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 힘 있는 자들은 골프공처럼 타인을 갖고 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도 전상두가 골프공을 갖고 노는 장면이 있다. '내가 너희들을 다 갖고 놀아'라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골프장이라는 어쩌면 약간 뜬금없는 공간을 선택하고 그 상황을 만든 거다.
영화 '행복의 나라' 스틸컷. NEW 제공 ▷ 골프장 신에서의 대사는 어쩌면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영화는 그 장면 전까지는 다큐멘터리처럼 만들었다. 골프장 장면은 판타지라 생각하는데, 나한테는 그 장면이 제일 좋았다. 영화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해보는 것, 그것이 영화지 않나. 재명씨도, 정석씨도 좋아했다. 시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저게 말이 돼?'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나한테는 판타지였다. 그리고 감정적으로나 상황적으로, 그 당시 밑바닥의 누군가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항거했다고 생각한다. 더 낮은 곳, 더 밑에 있는 사람이 권력을 향해 부당하다고 소리쳤을 거다. 시대로 치환해 보면 납득하기 쉽다. 개인으로 생각하면 어려운 이야기지만, 부당함에 대해서 누군가가 이야기한다고 보면 가능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 '행복의 나라'는 10·26 사건을 모티프로 했지만 다큐멘터리가 아닌 '영화'다. 그런 점에서 실제 사건, 실존 인물을 모티프로 한 영화에서 영화적 상상력의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난 영화는 판타지의 산물이라 생각한다. 누군가 사랑하고 싶을 때는 멜로를 보고, 재밌고 싶을 때는 코미디를 본다. 내가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지만, 액션 장르를 보면서 나름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일종의 대리만족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역사적인 사실을 기반으로 갖고 오면 훨씬 힘이 세진다고 본다. 그걸 갖고 와서 어떻게 가공해서 우리의 판타지를 풀지가 중요하다. 대신 그 고리가 헐거워선 안 된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최선을 다해 그 고리를 채워 넣는 거다.
['행복의 나라'로 뛰어든 사람들 ③]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