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행복의 나라' 제작사 오스카10스튜디오 장진승 대표, 파파스필름 이준택 대표. 박종민 기자※ 스포일러 주의 현대사의 중요한 변곡점 중 하나인 10·26 사건을 다룬 콘텐츠가 그동안 주로 주목한 인물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었다. 그러나 김 전 부장이 아닌 박흥주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관이 영화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아빠가 없다고 절대로 기죽지 말고 전처럼 매사 떳떳하게 지내라"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박 대령의 마지막 편지가 영화 제작자의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킨 박 대령의 선택, '어떻게 저런 선택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파파스필름 이준택 대표를 10·26 사건 재판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시나리오 개발에 들어갔고, 우여곡절 끝에 오스카10스튜디오 장진승 대표와 추창민 감독을 만나 '행복의 나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장 대표와 오랜 인연의 추 감독이 합류하며 정체되어 있던 시나리오를 각색하기 시작했다. 박 대령을 모티프로 한 박태주 대령(이선균) 중심의 감성적인 이야기는 정인후(조정석) 중심의 간결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장 대표는 추 감독과 처음 이야기했을 때를 떠올리며 "감독님이 세 인물(정인후, 박태주, 전상두)을 통해 객관적으로 접근하고 '야만의 시대'를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다"라고 전했다. 그렇게 10·26 사건과 12·12 군사반란을 가로지르는 격변의 시대이자 야만의 시대가 완성됐다.
영화가 개봉해 관객들과 만나고 있는 어느 날, 서울 양천구 목동 CBS노컷뉴스 사옥에서 장진승 대표와 이준택 대표를 만나 '행복의 나라' 제작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영화 '행복의 나라' 스틸컷. NEW 제공 야만의 시대, 과거를 현재로 소환하다
"원래 시나리오는 박태주 대령 이야기가 중심이었어요. 박 대령에 초점을 맞춰서 '이런 사람이 있고, 마지막에 안타까운 일을 겪었다'라는, 사람이 중심인 영화였죠. 그러나 추 감독님은 정인후는 일반인의 시선, 전상두(유재명)는 욕망과 권력이자 무자비하게 찍어 누르는 사람, 박태주는 휘말리는 사람, 이렇게 세 사람을 균형 있게 보여주며 시대를 보여주고자 했죠. 그러면서 신파도 빠지고, 임팩트로 보면 셋의 균형을 맞춰서 표현하게 됐어요." _장진승 대표
이준택 대표는 각색된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지점은 영화를 "요즘 시대로 끌고 왔다는 것"이었다. 정인후라는 인물이 요즘 젊은 세대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인후는 전상두는 물론 참모총장, 선배 변호사들을 향해서도 할 말을 다 한다. 그런 캐릭터가 요즘에 부합하지 않을까. 그게 시원하고 통쾌한 영화"라고 요약했다.
정인후는 어떤 권력, 어떤 폭력 앞에서도 자신의 말을 잃지도 않고, 불합리한 일들에 맞서 홀로 고군분투한다. 이를 이준택 대표는 "감독님이 과거 이야기를 요즘 이야기로 치환해 줬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인후 입장에서는 아버지나 변호사 선배, 박흥주, 전상두 모두 기성세대"라며 "어떤 기성세대는 배울 게 있고, 어떤 기성세대는 부딪혀도 안 되고, 또 부딪히면서 성장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어느 기성세대와는 비슷한 모습으로 되어 가기도 한다"라고 이야기했다.
영화 '행복의 나라' 스틸컷. NEW 제공 '행복의 나라'는 '골프장 신'을 향해 달려 나갔다
할 말 다 하는 캐릭터 정인후의 모습을 가장 영화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자 야만의 시대, 폭력적인 권력을 향한 시민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 상징적인 장면은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골프장 신이다.
엄혹했던 시기, 민주주의를 염원했던 모든 시민은 전상두로 대변되는 폭력적인 권력 앞에서 민주주의를 외쳤다. 감독이 '행복의 나라'를 통해 시대를 그려내고자 했다면, 골프장 신은 시대를 은유하는 대표적인 신이라 할 수 있다.
이준택 대표는 골프장 신에서 만난 정인후를 두고 추창민 감독이 잘 성장시켜 줬다고 표현했다. 누군가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장면이지만, 앞서 정인후가 한 걸음씩 성장해 온 행보를 생각한다면 가능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영화 '행복의 나라' 스틸컷. NEW 제공이 대표는 "골프장에서도 전상두가 (자신을) 살살 건드니 정인후는 할 말을 한 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상두의 실존 인물인 전두환씨에 대한 이미지가 있다 보니 판타지 같은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모든 것은 감독님이 차곡차곡 쌓아나간 결과"라고 설명했다.
장진승 대표도 "어떻게 보면 골프장 신 때문에 '행복의 나라'가 만들어졌구나 내지 그 신을 위해 달려왔구나 생각한다. 그만큼 중요한 신"이라고 했다. 정인후는 박태주를 살리기 위해 처절한 심정으로 전상두에게 호소하지만, 그는 마치 정인후를 티끌처럼 하찮은 존재로 대한다. 정인후뿐 아니라 전상두에게는 시민의 목숨은 언제든 버릴 수 있는 부차적인 요소다.
골프공을 가지도 놀 듯이 정인후를 달리게 만드는 것만 봐도 전상두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다. 장 대표는 "(전상두가)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 없으니 그 모습을 보며 정인후가 폭발해서 감정적으로 터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이 대표는 "그 모습을 보며 우리끼리 농담처럼 웃으며 '전상두 정말 얄밉다'는 이야기를 했다"라고 했다.
영화 '행복의 나라' 제작사 오스카10스튜디오 장진승 대표, 파파스필름 이준택 대표. 박종민 기자 '행복의 나라'가 남긴 것과 다가가야 할 곳
정인후가 '행복의 나라'를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는 중심인물로서 가이드 역할을 하지만, 출발은 실존 인물인 박흥주 대령이다. 그런 만큼 박 대령이 현시대에서 제대로 재평가받기를 바라는 건 두 제작자의 공통된 마음이다.
이 대표는 "분명 시작할 때는 그런 게 있었다.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가 다시 한번 온다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라며 "역사적인 사건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불행하게 희생된 사람들일 수 있다. '행복의 나라'가 그들이 다시 평가받을 기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이 대표는 '행복의 나라'가 그 당시 할 말을 미처 다 하지 못한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공간이 되길 바랐다.
이 대표는 역사를 다루는 영화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봤다. 그는 "역사를 배우는 이유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현재는 과거를 통해 미래와 연결해 주는 다리"라며 "영화를 통해 과거를 되짚어 보면서 미래로 연결해 나가는 선한 영향을 발휘하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영화 '행복의 나라' 스틸컷. NEW 제공두 사람에게도 과거 현장은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지고 있다. 제작자에게 무엇보다 큰 자산인 '경험'을, 다른 어떤 영화에서도 할 수 없었던 값진 경험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우선 자신과 함께 '행복의 나라'를 끌고 온 장 대표에게 고마움을 드러냈다. 그는 "장 대표와 같이하면서 신경 쓸 게 별로 없었다. 장 대표가 다른 걸 다 정리해 주니 너무 편했다"라며 웃었다. 장 대표와의 협업은 자신에게 새로운 영화 현장을 만날 수 있게 해줬다.
"현장에서 감독님께 '왜 이렇게 찍어요?'라고 계속 물어보는 게 너무 행복했어요. 영화를 하면서 그래본 적이 없거든요. 영화를 새로 배워가며 한 현장이었어요. 그래서 전 사실은 제작하면서 고비나 이런 건 없었어요. 그렇기에 이 보답이 모두에게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노력한 사람에게 좋은 결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_이준택 대표 장 대표 역시 영화 초반 추 감독의 의중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 이후부터는 막힘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 그는 "제작자에게 가장 큰 어려움과 숙제는 감독과 배우 간 가교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장 분위기도 좋고, 서로에 대한 시너지가 나서 좋았다. 그러면 제작자가 별로 할 일이 없다"라며 "난 옆에서 쳐다만 봐도 될 정도였다"라고 이야기했다.
톱니바퀴가 맞물리듯이 현장은 감독, 배우, 스태프 모두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맞물려 돌아갔고, 이러한 현장 분위기는 각 파트에서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누군가는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역할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이준택 대표는 영화 속 풀샷들을 보면 현장의 모든 배우가 역할을 가리지 않고 얼마나 열연을 펼쳤는지 만날 수 있다고 알려줬다. 이 대표는 "저 뒤에 잘 안 보이는 배우들도 알게 모르게 연기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배우들이 '내가 그 연기를 해서 그 컷이 오케이 된 거야' '네가 NG 냈었잖아'라며 웃으며 이야기하기도 했다"라며 미소 지었다.
영화 '행복의 나라' 스틸컷. NEW 제공이제 영화는 두 사람의 손을 떠났다. 두 제작자는 물론 감독, 배우, 스태프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행복의 나라'를 완성했고, 이제는 관객들과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에게 남은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행복의 나라'가 보다 많은 관객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전 '행복의 나라'가 정인후라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이 부딪히면서 시원하게 성장해 가는 영화라고 말하고 싶어요. 외피는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을 갖고 오면서 본의 아니게 슬프고 비장한 게 있지만, 사실 정인후가 분투하는 영화거든요. 젊은 친구가 통쾌하게 내지르는 걸 생각하며 만들었어요. 시원하게, 뭔가 응어리를 풀 수 있는 영화로 봐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_이준택 대표
"개봉하면서도 '내가 이걸 왜 시작했지?'를 생각했을 때 초창기로 돌아가면, 정인후가 마지막에 이야기하죠. 대한민국은 박태주를 아무도 기억 못 한다고 말이에요. 우리가 아는 굵직한 사건의 이면에 우리가 모르는 한 사람을 주목한다는 건 재밌고 신선한 접근 아닐까요? 그리고 평가나 리뷰 등을 보면 결국은 '연기 배틀' 내지 '연기 차력 쇼'라고 하는데, 주연은 물론 조·단역까지도 연기가 탄탄하니 연기 보는 맛도 있어요." _장진승 대표 ['행복의 나라'로 뛰어든 사람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