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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 그리고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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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제주CBS는 광복 79주년을 맞아 이준 열사의 구국운동을 소개한다. 이준 열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법률학교 1회 졸업생으로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취임했지만 윗사람들의 비행을 탄핵하다 면관됐다. 이후 기독교로 개종한 후 구국운동을 펼쳤다. 광복은 선열들의 뜨거운 독립운동을 통해 이뤄졌다. 독립운동가 후손인 이양재 선생의 기고를 통해 이준 열사가 펼쳤던 독립운동과 이 시대 광복의 의미를 찾아본다.

[이준 열사와 그 동지들⑩]

안중근.안중근. 이양재 제공
▶ 글 싣는 순서
①이준 열사, 기독교로 개종하다
②이준 열사, 서재필과 입헌정치·공화정 추구
③신앙 동지 김구와 전덕기 목사
④게일 목사와 국민교육회 동지들
⑤동기동창이자 절친 함태영 목사
⑥황성기독교청년회 최대 후원자 민영환
⑦대를 이은 독립항쟁 동지
⑧대를 물린 동지 이범진과 이위종
⑨국채보상운동 주역 서상돈·김광제·양기탁
⑩이준 열사 그리고 안중근

천주교인 안중근(1879~1910)과 개신교인 이준(1859~1907)은 20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교유(交遊)했다. 조선시대 20세 차이면 상호간에 부자의 예로 대해야 했지만 이준은 안중근을 아들보다는 젊은 동지로 대했다. 안중근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신앙심이 독실했고, 안중근은 1895년 천주교 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배웠다.
 
안중근과 이준은 최소 세 번의 인연이 있다. 첫 번째 인연은 안중근은 이준이 회장으로 있던 '대한국민교육회'(1904년 8월 24일 설립)를 드나들었고, 1906년에 평안남도 진남포에다 삼흥학교를 설립하고는 이준과 안창호(1878~1938)를 초청해 강연회를 연다.
 
두 번째 인연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과 관련한 인연으로, 안중근은 자청해 이준이 회장으로 있던 '국채보상기성회'의 관서지부를 개설하고 지부장이 된다. 안중근은 1907년 2월 평양 명륜당에서 천여 명을 대상으로 국채보상운동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해 큰 성과를 거둔다.
 
세 번째 인연은 대한제국 시기 비밀 조직의 인연이다. 1907년에 겨울 안중근 김기룡 엄인섭 등이 의형제를 맺은 뒤 항일의병을 일으킬 목적으로 연해주 각지의 동포사회를 순방하며 뜻있는 청년 87명을 결집해 동의회를 만든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상은 1905년 을사늑약에 반발해 이용익과 이범진이 발의한 지하 조직이다.
 
공식적으로 동의회는 1908년 4월 이른바 안중근을 중심으로 한 행동파 '87형제'들이 최재형 집에 모여 창설한다. 이때 선출된 동의회 임원은 총장에 최재형, 부총장에 이범윤, 회장에 이위종, 부회장에 엄인섭, 서기에 백규삼이었다. 부총장 이범윤은 이범진의 형이며, 이위종은 이범진의 아들이다.
 
1907년 6~7월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시도한 평화-외교적 방법의 독립운동이 헤이그에서 좌절하자, 1908년 동의회가 공식 출범하고 독립항쟁에 나선 결과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등박문을 격살한다. 동의회 조직의 창설 흐름에 이준과 안중근이 있는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 인연이다. 그것을 알면 31세 안중근의 사진에서 48세 이준을 떠올리게 된다.

▲ 글쓴이 이양재(69) 선생=독립운동가 이병식 선생의 증손자로 (재)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과 (사)한국고서협회 상임부회장으로 고서화감정가이다. 서지학과 회화사학자로 2009년부터 제주에 머물며 제주관련 고서도 수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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