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3월 7일자 관보. 면직된 이선재(이준)와 새로 임명된 함태영이 나란히 기록돼 있다. ▶ 글 싣는 순서 |
①이준 열사, 기독교로 개종하다 ②이준 열사, 서재필과 입헌정치·공화정 추구 ③신앙 동지 김구와 전덕기 목사 ④게일 목사와 국민교육회 동지들 ⑤동기동창이자 절친 함태영 목사 (계속) |
순국열사 이준과 독립운동가 함태영(1873~1964)은 법관양성소에서 함께 법리를 공부한 동기동창이자 절친이었다. 함태영은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이듬해 1896년 이준의 뒤를 이어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임명되면서 법관 생활을 시작한다.
그 역시 이준과 마찬가지로 재직 중 강직한 성품과 불의를 응징하는 성향을 보인다. 1898년 10월 독립협회 주최로 만민공동회가 조직되고, 시국에 대한 6개 조의 개혁안(헌의육조)을 결의해 고종에게 실행을 주청했다. 폐위(廢位)에 불안을 느낀 고종이 독립협회 혁파령을 내리고 이상재 등 중심인물 17인을 검거해 재판에 넘긴다.
당시 한성재판소 검사로 이 사건을 담당한 함태영은 사건을 공정하게 조사한 결과 내란죄를 적용할 수 없음을 알고 가벼운 처벌을 받도록 판결한다. 이에 따라 그는 파면된다.
이후에도 고등재판소 검사, 평리원 검사, 법부 법률기초위원, 대심원 판사, 복심법원 판사를 역임하면서 강직함은 변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당시 수구 관료층의 미움을 받아 면관·복직되기를 반복한다.
수구 관료층이 보기에 독한 검사 이준을 쫓아내니 더 독한 검사 함태영이 들어와 대한제국의 법원을 휘저은 것이다. 이준이나 함태영의 이러한 행동은 법리 원칙을 지키고자 하는 법 정신에 원인이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 기독교 계통의 독립운동은 두 곳에서 규합하였는데, 연동교회와 평양신학교에 적을 두고 있던 함태영은 감리교 세력을 접촉해 3·1운동에 끌어들였다.
이 밖에도 천도교계와의 연락, 파리강화회의,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선언서를 발송, 독립선언서의 지방 배포 등을 담당하는 등의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다른 민족대표들이 잡힐 때 그들의 가족을 보호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최린 등의 부탁을 받아 33인의 민족 대표로는 서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3·1독립운동의 주동 인물로 붙잡혀 이듬해 10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는다.
1907년 7월 14일 이준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순국하지만,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고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국내에서는 이준이란 이름은 금기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독립군과 광복군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준과 안중근을 되새기며 항전해 나갔다.
해방된 이듬해 3~4월에 함태영은 김구 이갑성 김창숙 윤치영 등과 함께 절친 이준을 기리기 위한 '이준열사기념사업회'를 발기한다. 그리고 1946년 7월 14일 해방 후의 첫 추도일을 맞아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를 출범시키고, 여기에서 그는 제1대 회장으로 선출된다.
광복된 이후 함태영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고문과 미군정의 자문기관 민주의원을, 1949년 11월부터 1952년 7월까지는 제2대 심계원장(현재의 감사원)을 지낸다.
1952년 2월에는 한국신학대학 학장으로 추대받아 재직하던 중 1952년 8월에 제3대 부통령에 당선돼 1956년까지 재임한다. 함태영의 일생을 보면 이준의 신앙과 애국 애족의 정신이 보인다. 그 둘은 죽음을 넘어서까지 맺어진 가장 가까운 동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