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제(좌)와 양기탁. 이양재 제공▶ 글 싣는 순서 |
①이준 열사, 기독교로 개종하다 ②이준 열사, 서재필과 입헌정치·공화정 추구 ③신앙 동지 김구와 전덕기 목사 ④게일 목사와 국민교육회 동지들 ⑤동기동창이자 절친 함태영 목사 ⑥황성기독교청년회 최대 후원자 민영환 ⑦대를 이은 독립항쟁 동지 ⑧대를 물린 동지 이범진과 이위종 ⑨국채보상운동 주역 서상돈·김광제·양기탁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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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이 회장으로 있던 '헌정연구회'는 1906년 윤효정 장지연 나수연 김상범 임병항 등이 보다 주체적 목표를 가진 자주 자강의 애국계몽운동단체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로 개편한다.
이듬해인 1907년 1월 29일 오전 200여 명이 참석한 대구 광문사의 특별회의를 끝낸 직후, 부사장 서상돈은 '국채보상운동 건의서'를 제출한다. "우리 2천만 동포가 담배를 끊고 그 대금으로 매월 1명당 20전씩 모은다면, 3개월 만에 국채를 다 갚을 수 있을 것이다."
서상돈이 이 건의서를 낭독하자, 회원들은 즉시 모금할 것을 결의하고, 각 도마다 이러한 취지를 알려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제안했다. 당시 광문사 사장이자 '대한자강회' 회원 김광제는 당장 실천에 옮기기로 하고, 자신의 담뱃대와 담배쌈지를 버리고 3개월분의 담배 값 50전과 추가로 10전을 보태 60전을 출연한다. 서상돈도 그 자리에서 800원을 출연하는데 그 자리에서 무려 2천원이 모금된다.
1907년 2월 22일 서울의 '대한자강회' 회원 김성희, 광학서포 사장 김상만, 중앙서림 사장 주한영 등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조직하는 등 서울에서도 여러 단체가 조직되어 의연금 모금 운동을 전개한다. 서병염과 윤흥섭 등은 '국채보상중앙의무사'를 조직하고 의연금 납부처로 '황성신문사'를 정하였고, '황성신문'에서는 1907년 2월 25일 이 운동에 전 국민이 참여해 국채를 갚을 것을 호소하는 '단연보국채(斷煙報國債)'라는 논설을 발표한다.
1907년 4월에는 국채보상운동을 지도, 총괄하기 위한 통합기구로 대한매일신보사 내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소장 한규설, 부소장 김종한, 검사원 양기탁)와 '대한자강회' 사무소에 '국채보상연합회의소'(의장 이준, 부의장 김광제, 위원장 윤효정)를 설치했다. 두 단체의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각기 의연금의 수합과 국민 지도라는 역할 분담을 한다. 서울에 '국채보상기성회'가 조직된 후에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을 목적으로 한 단체들이 조직된다.
특히 여성들의 참여가 눈에 띈다. 대구의 부인들이 은반지를 의연하면서 '경고문'을 '대한매일신보'에 한글로 발표했다. 이 기사를 본 이준의 부인 이일정은 '국채보상부인회사무소'를 대안동 김규홍 판서댁에 설치하고 1907년 3월 15일에 '국채보상부인회 취지서'를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한다. 이를 계기로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여성들에게 확산한다.
이준은 1907년 4월22일 헤이그로 떠나기 직전까지 '국채보상연합회의소' 회장으로서의 직무를 다 했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통감부는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을 보상금을 가로챘다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고, 발행인 어니스트 베델을 국외로 추방한다.
양기탁은 게일 목사가 편찬하던 『한영자전』의 편찬을 도왔고 1911년에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구속된 것을 보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다. 이렇듯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확산에 이준을 비롯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대한자강회 회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의연금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