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B컷]법정에 100차례 울려 퍼진 '그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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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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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재판은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형사재판에서 피고인과 검찰 양측은 '실체적 진실'에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가능한 한 최대한 많은 증거를 제시하고, 최대한 많은 주장을 내놓습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개발 비리 의혹 재판에서 이 대표 측과 검찰이 신청한 증인만 100명이 넘습니다.
 
더 나아가 외국에서는 '앵무새의 증언'까지도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로 채택되기도 합니다. 2017년 미시간주 뉴웨이고 카운티 배심원단은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받던 한 여성에게 유죄평결을 내렸습니다. 목격자도 증거도 없어 2년간 미제로 남았던 사건이지만, 배심원단이 "쏘지 마!(Don't shoot)"라는 남편의 음성(살해당하던 날 남편의 마지막 말이었을 겁니다)을 수없이 반복하던 앵무새의 증언을 증거로 채택한 끝에 유죄 판단이 나온 겁니다. 오늘 법정B컷은 앵무새처럼 보였던 한 증인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증인에게는 의무와 권리가 있다

증인에게는 '의무'와 '권리'가 부여됩니다. 증언할 의무와, 증언하지 않을 권리가요.
 
2019.11.21. 대법원 2018도13945 전원합의체 선고
증인으로 출석하여 증언할 의무는 형사소송법의 중요한 이념인 실체적 진실의 발견을 위한 것이다. 형사소송법이 이러한 실체적 진실의 발견이라는 근본적인 이념을 양보하여 일정한 사정에 따라 증언거부권을 부여한 경우에만 증언의무가 면제된다.

그렇다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증언 의무가 면제될까요? 증언하지 않을 권리는 2가지 경우에 인정됩니다. 우선 첫 번째로는 형사소송법 149조에 따르면 변호사, 의사 등의 업무에 종사하거나 종사했던 증인이 업무상 알게 된 사실로서 타인의 비밀에 관해서는 증언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바로 오늘 법정B컷의 키워드인 '형사소송법 148조'에 해당할 때입니다.
 
형사소송법 제148조 (근친자의 형사책임과 증언 거부)
누구든지 자기나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가 형사소추 또는 공소제기를 당하거나 유죄판결을 받을 사실이 드러날 염려가 있는 증언을 거부할 수 있다.
1. 친족이거나 친족이었던 사람
2. 법정대리인, 후견감독인


누구든지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는다는 '자기부죄거부(自己負罪拒否)권'을 보장하는 헌법 12조에 기초해 만들어진 이 조항은 모든 증인에게 적용됩니다.
 

"형사소송법 148조의 권리를 행사하겠습니다"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 박종민 기자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 박종민 기자
지난 10일, '김학의 불법 출국금지' 항소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재판에 앞서, 박 전 장관은 증언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의견서를 제출했죠. 그렇다고 증인신문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 건 아닙니다. 증인이 거부권 행사 의사를 밝혔어도, 검사에게는 신문할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2024.6.10. 서울고등법원 형사11-3부, '김학의 불법 출국금지' 공판 中
판사 : 증언 거부권 의견서를 낸 것은 봤습니다. 냈다고 하더라도 일단 신문을 진행하겠습니다.

검사 : 증언거부권 관련해서 증인도 아시겠지만 개개 질문에 행사해야 하는데 질문 내용을 보면 증인의 증언으로 인해서 증인이 향후 형사 소추의 가능성과 관련이 없는 질문이 상당히 있습니다. 그런 부분에 대한 증언거부권 행사가 적절한지 의문입니다. 그런 부분을 고려하셔서 증인께서도 잘 들으시고 답변하는 과정에서 증인의 형사처벌과 관련된 부분이 아니라면 성실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이처럼 검찰 측은 박 전 장관에게 우려를 표한 뒤, 본격적인 증인신문을 시작했습니다. 증인은 '실체적 진실' 발견에 협조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형사소송법 148조의 권리는 '제한적으로만' 행사돼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싶었던 거겠죠.
 
그도 그럴 것이, 박 전 장관은 이 재판에서 중요한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불법 출금 사건 당시, 박 전 장관은 법무부의 수장이었습니다. 2019년 3월 22일 법무부 출입국 외국인 정책본부장이었던 차규근 의원과 당시 대검 과거사진상조사단 파견 검사였던 이규원 검사,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 선임행정관이었던 이광철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 등이 이른바 '별장 성접대 의혹'을 받던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에 대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불법으로 출국금지 조치를 했을 당시 말이죠.
 
이 사건 1심 재판부는 차 의원과 이광철 전 비서관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고, 이규원 검사에 대해서는 징역 4개월의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피고인들과 검찰 측이 모두 항소했습니다.
 
2심까지 오게 된 만큼, 이 사건 당시 검찰 사무의 최고 감독자이자, 출입국 관리 등 법무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총책임자였던 박 전 장관은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증인신문에서의 첫 답변에서부터, 그 기대는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2024.6.10. 서울고등법원 형사11-3부, '김학의 불법 출국금지' 공판 中
검사 : 증인은 2017년 7월부터 9월경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했죠?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 : 저는 형사소송법 148조의 권리를 행사하겠습니다.
 
검사 : 증인은 법무부에서 2017년 12월 12일경 법무부 훈령으로 검찰 과거사위원회 훈령을 제정해 위원회 활동을 시작했고, 대검은 2018년 2월 5일 대검 훈령으로 검찰 과거사 사건 진상 규명 조사단 운영 규정을 제정해 대검 과거사 진상 조사단 활동을 했는데요. 검찰 과거사위원회 업무는 진상조사에 필요한 사건을 산정하고, 조사 결과를 검토하고 심의하는 게 맞나요?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 : 저는 형사소송법 148조의 권리를 행사하겠습니다.
 
검사 : 검찰 과거사위원회 규정을 제시하겠습니다. 증인도 알겠지만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규정을 보면 과거사위원회는 과거 검찰에 의해 인권침해, 권한남용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와 유사사례 재발 방지 및 피해 회복 위한 조치를 법무부장관에게 권고하고 그밖에 장관의 자문에 응하는 기구일 뿐, 직접 대검이나 일선 검찰청에 조치 취할 권리가 없죠?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 : 저는 형사소송법 148조의 권리를 행사하겠습니다.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 박종민 기자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 박종민 기자
당시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김 전 차관 관련 재수사를 권고한 이후 이 사건의 출국금지가 이뤄진 만큼, 검사는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일반적인' 역할과 권리에 대해 물었습니다.
 
하지만 박 전 장관은 이에 대한 답변도, 심지어는 장관 재직 시기에 대한 답변조차도 거부합니다. 앞서 검찰 측이 말했듯 '형사 소추의 가능성과 관련이 없는 질문'인데도 말이죠.
 
이어진 신문에서는 본격적으로 '출국금지' 조치에 대한 질문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박 전 장관은 이때도 일관된 태도를 유지합니다.

2024.6.10. 서울고등법원 형사11-3부, '김학의 불법 출국금지' 공판 中
검사 : 2019년 3월 20일 검찰 고위 간부 회의할 때 김학의 출국금지를 논의하게 된 경위는 어떻게 되나요?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 : 저는 형사소송법 148조의 권리를 행사하겠습니다.
 
검사 : 대검 과거사 진상조사단의 조사를 받던 김학의는 피의자가 아니고 행정조사 대상자에 불과했는데, 행정조사 대상자에 대해 출국금지 논의한 이유가 뭐죠?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 : 저는 형사소송법 148조의 권리를 행사하겠습니다.
 
검사 : 검찰은 수사기관에서 김학의에 대한 수사 진행 상황이 없다는 것은 김학의가 피의자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인정할 중요한 근거죠?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 : 저는 형사소송법 148조의 권리를 행사하겠습니다.
 

검사 : 증인께서는 출입국관리법, 그리고 그 법 시행령 시행규칙 등에 의거해서 출국금지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범위에서 해야 하고 단순히 공무수행 편의를 위해서는 안 되며 범죄사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이 규정을 알고 있죠?


박상기 전 법무부장관 : 저는 형사소송법 148조의 권리를 행사하겠습니다.
 
검사 : 증인은 법학 교수로서, 장관으로서 출국의 자유를 제한하는 출국금지는 제한적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죠?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 : 저는 형사소송법 148조의 권리를 행사하겠습니다.
 
검사 : 우리나라는 법치국가고 기본권 제한을 위해서는 헌법 등에 따라서 제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언론보도 내용만으로 법무부장관이 직권으로 출국금지 할 수는 없는 거죠?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 : 저는 형사소송법 148조의 권리를 행사하겠습니다.


이렇게 박 전 장관은 이날 재판에서 100차례가 넘게 증언을 거부했습니다. 강제조사권이 없는 대검 과거사 진상조사단이 무리하게 출국금지를 시도하면서 급히 작성된 '긴급출국금지 신청서'에 가짜 서울동부지검 내사번호가 적히는 등 '절차적 하자'가 발생했던 이 사건.
 
검사의 말대로 '법학교수'이자 '장관'을 지낸 박 전 장관이 모를 리 없는 내용임에도, 박 전 장관은 앵무새처럼 "형사소송법 148조의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문장만을 반복했습니다. 박 전 장관이 입을 연 것은 증인신문이 끝날 무렵, 딱 한 번이었습니다.
 
2024.6.10. 서울고등법원 형사11-3부, '김학의 불법 출국금지' 공판 中
판사 : 이 사건과 관련해서 증인은 하고 싶은 얘기 없나요?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 : 없진 않지만, 형사소송법 148조의 권리를 행사하는 이유가 신문과 반대신문을 통해서 사건의 본질이 잘못 흘러갈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증언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드리고 싶은 말씀이 없습니다.

 

형사소송법 최고 이념은 '실체적 진실 발견'인데…

박 전 장관의 마지막 발언에는 의문이 남습니다. 그의 말대로 사건의 본질이 잘못 흘러갈 위험성이 있다면, 오히려 스스로 적극적인 증언을 함으로써 그 위험성을 차단하고 반박하는 방법 또한 사건의 본질, 즉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는 데 일조하는 방안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이처럼 '형사소송법 148조'를 외치는 증인은 박 전 장관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 사건의 1심에서도 당시 증인으로 나온 이종근 전 검사장은 170차례 이상 형사소송법 148조 권리를 행사하겠다며 170차례가 넘게 답변을 거부했습니다. 이 전 검사장은 박 전 장관의 정책보좌관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황진환 기자황진환 기자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또한 지난 2020년 부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의 재판 증인석에 나와 '형사소송법 148조'를 들며 재판 내내 300번이 넘도록 증언거부권을 행사한 바 있습니다.
 
증언거부권은 물론 엄연한 권리입니다. 하지만 증언할 의무도 증인의 엄연한 의무인 만큼, 이번 증인신문에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람이 아닌 '앵무새'의 증언도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로 채택될 정도로, 증인의 증언은 강력한 힘을 가집니다. 그럼에도 '앵무새'처럼 형사소송법 148조만을 외치던 박 전 장관, '증인의 의무'를 너무도 가벼이 여긴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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