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의 한 교파인 장로교에서 운영하는 비영리 기관, '커크브레(Kirkbrae)' 입구. 은퇴자들이 입주해 사는 주택단지(Retirement Living)와 요양시설(Aged Care)로 구성돼 있다. 이은지 기자▶ 글 싣는 순서 |
①평균 '80대 중반'에 시설 입소하는 호주…"홈케어가 新표준" ②[르포]"은퇴 이후부터 임종까지"…'올인원' 돌봄 마을 ③[르포]시설內 돌봄역할 커지는 간호사…"최소 2명이 사망선언도" (끝) |
호주 멜버른 시내 중심가에서 약 35㎞ 떨어진 킬시스(Kilsyth)에 위치한
'커크브레(Kirkbrae Presbyterian Homes)'는
개신교의 교파인 장로교에서 운영하는 비영리 시설이다.
지난달 15일 오전(현지시각), 가로수가 빼곡한 주택가에 들어서자 금세 우측으로 도착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기관명 앞에는
'돌보는 커뮤니티를 성장시키는(Growing A Caring Community)'이란 수식이 새겨져 있었다.
트랙터를 끌고 가던 노인은 주차장을 두리번거리던 일행에게 누구를 찾아왔냐며 환대했다.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으니 문득 등 뒤의 지도가 눈에 띄었다.
아카시아, 와라타(waratah·진홍색 꽃을 피우는 호주산 프로테아과 관목), 자카란다 나무(jacaranda)…. 입소자들이 기거하는 집들에는 모두 이 땅에서 자라는 식물들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접수와 상담이 이뤄지는 리셉션 건물은 오스트레일리아산 상록수를 뜻하는
'뱅크셔(banksia)'였다.
이같은 작명은 '커크브레'의 소재가 단데농 산맥(Dandenong Ranges)의 끝자락이란 점과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단데농이란 지명은 유럽인들이 들어오기 전 이곳에 살고 있던 워이우룽(Woiwurrung)족이 '아주 높은 산'을 부르던 말(Tanjenong)에서 유래했다.
하루 전 방문한 '빌리지글렌(Village Glen)'이 비교적 도심형에 가까운 주거단지라면, 커크브레는 그보다 좀 더 띄엄띄엄 연결된 시골 커뮤니티처럼 느껴졌다. 커크브레 내 은퇴자들이 사는 단독주택(Retirement Living) 전경. 이은지 기자기본적으로 이원화된 시설 구성은 커크브레도 빌리지글렌과 비슷하다.
은퇴자들이 독립적으로 사는 집들(Retirement Living)과 노인요양시설(Aged Care)로 나뉘어져 있는데, 전자에서 후자로 이행하는 경우도 흔하다. 시설 단계는 보호자의 쉼을 지원하는 단기휴식 서비스(respite·최대 63일)와 영구 입소, 2가지다.
다만, 이용자 수를 비교하면 비영리기관인 커크브레가 현저히 적었다.
주치의 등의 도움을 계속 받더라도 혼자서 생활이 가능한 단독주택은 78명, 밀도 높은 돌봄을 필요로 하는 요양시설에는 73명의 노인이 각각 입소해 살고 있다. 사립인 빌리지글렌(주택단지 880명·요양시설 180명)의 약 14% 남짓 수준이다.
"몇 년 간 문지방도 안 넘던 입소자, 약 끊었다"
호주 '커크브레(Kirkbrae)'의 최고경영자(CEO)인 안젤리카 오야르준(Angelica Oyarzun)이 지난달 15일 시설 내부 홀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은지 기자그래서일까. 커크브레(Kirkbrae)가 공식 팸플릿에 스스로 내세운 전체 시설, 특히 에이지드 케어의 강점은 '규모'가 아니었다.
△아름다운 정원과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상시 정주해 있고(Established beautiful gardens, leafy trees) △포괄적인 동시에 '개인'에 초점을 맞춘 사적 돌봄이 이뤄진다(Inclusive, personalized care with individual focus)는 게 이들의 자랑이었다.
이는 시설의 최고경영자(CEO·Chief Executive Officer)인 안젤리카 오야르준(Angelica Oyarzun)의 자평과도 상통했다.
"(보다시피) 우리에겐 넓은 부지가 있어요. 사람들은 바깥에 널찍이 앉아 뜰을 즐기고 또 가족들도 편하게 와서 이 공간을 향유할 수 있죠. 크고 높은 호텔형 시설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돌아다닐 만한 산책 공간이 충분치 않으니까요." 그는 기자에게 커크브레가 '너무 크지 않다(not too big)'는 것이 되레 장점이라며 "그렇기에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을 숫자로 여긴다고 느끼지 않는다. (시설 운영은) 매우 가족지향적(very family-oriented)"이라고 말했다.
1960년에 지어져 60년이 넘은 건물은 다소 낡았지만
돌봄의 질만큼은 어떤 대형 요양시설에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자부심도 내비쳤다("The care is excellent here"). 그 '탁월한 케어'의 예시를 하나만 들어 달라고 부탁하자, 안젤리카는 "(서비스 품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스태프"라며 현재도 시설(aged care)에서 생활 중인 노신사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커크브레에 여러 해 동안 계신 환자 분인데 정신건강에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어요. 늘 방 밖으로는 한 발짝도 안 나오셨고요. 또 매일 30분마다 진통제와 항불안제를 달라고 의사한테 요구하셨어요. 그렇게 몇 년을 두문불출했었는데…지난해 어느 날 방문을 열고 나오시더니, 이제는 약을 전혀 찾지 않습니다."
안젤리카는 왕립위원회 권고에 따른 입법적 변화에 대한 적응에 우려를 표하면서도, 커크브레(Kirkbrae)의 돌봄서비스는 '탁월하다(excellent)'고 자평했다. 보건복지부 공동취재단경영책임자임에도 수치로 대변되는 객관적 지표보다 개별적인 사례로 시설의 '성취'를 강조한다는 게 흥미로웠다. 그럼에도
최근 수년에 걸쳐 이어진 호주 당국의 정책적 변화는 이윤추구가 최우선 목적이 아닌 커크브레 측에도 적잖은 부담이자 도전이다.
앞서 왕립위원회(The Royal Commission into Aged Care Quality and Safety)는 지난 2018년 노인요양 전반에 대한 조사에 착수해 2021년 최종 보고서를 내놨다. 당시 위원회는
호주에서 가장 큰 산업 중 하나인 요양업계가 노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진단했다.
대부분의 비중을 차지하는 재가서비스는 대상자가 대기 중 숨지는 일이 잇따를 정도로 예산 부족이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고, 요양원들도 인력난과 재정위기 등에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에
왕립위원회는 회계 투명성 제고, 요양보호사의 처우 개선 등을 포함한 148개의 권고사항을 연방정부에 전달했고, 호주 당국은 해당 내용을 정책에 차례로 반영 중이다.
현재 시설들이 가장 피부로 느끼는 부분은 인력 기준이다. 앞으로 노인요양시설은 등록간호사(RN·Registered Nurse)가 24시간·주 7일 상주해야 한다. 또
입소자들에게 의무적으로 하루 200분의 직접 돌봄을 제공하되 이 중 40분은 반드시 'RN에 의해서만' 이뤄져야 한다.
RN은 호주의 간호체계에서 가장 높은 등급이다. 보통 대학교 3년제 교육 후 학사(bachelor)를 취득해야 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간호사로 볼 수 있는데, 현장에서 인정되는 권한은 더 크다. 이외 국립기술전문대학(TAFE)에서 1년 정도 코스를 거친 EN(Enrolled Nurse)은 간호조무사와 유사한 개념이다.
문제는
'필수 돌봄시간(key minutes)'을 채우기 위한 RN의 구인이 녹록지 않다는 점이다. 절대인력이 부족한데 수요는 계속 늘고 있기 때문이다. RN의 평균 임금이 EN보다 상당히 높다는 점도 시설 입장에서는 경영상 어려움을 감수해야 하는 요인이다.
안젤리카는
"(특히) 규모가 중간 정도 되는 요양시설들은 당분간 살아남기가 굉장히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층 엄격해진 당국의 기준을 준수하지 못했을 때 따를 결과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한다"며 긴장감을 나타냈다.
높아진 당국 기준에 간호사 돌봄시간↑…시설들 '구인난'
커크브레 내 요양시설(Aged Care)에는 호주의 여타 시설들처럼 인지능력 문제를 지닌 노인들이 많다. 종종 가족 등을 따라 시설 밖으로 나가는 경우도 있어서 면회객들에게 이에 대한 주의를 요청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입소자들은 문 옆에 게시된 간단한 코드 번호를 눌러야 외부로 나갈 수 있다. 이은지 기자 커크브레 내 요양시설에는 총 102명의 스태프가 3교대로 일하고 있다. 간호사(RN) 20명을 포함해 PCA(Personal Care Assistant)라 불리는 요양사, 간호조무사(EN), 물리치료사 등이 상주하며 하루를 온전히 커버한다.
RN은 보다 전문적 지식·경험을 요하는 의료적 처치에 집중하고, 식사·샤워·세탁 등 일상적인 돌봄은 PCA가 담당한다. 의사들은 시설과 연계된 4~5명이 방문진료 형태로 환자를 본다.
이밖에 족(足)병치료의사, 언어치료사, 영양사 등은 필요에 따라 수시로 시설을 오간다. 삼킴장애가 있거나 식도에 문제가 생긴 환자들은 언어치료사의 진단을 통해 음식을 유동식으로 바꾸기도 한다.
필리핀 출신으로 커크브레에서 RN(Registered Nurse)으로 일하고 있는 알마는 자신의 고국도 점차 돌봄의 주체가 가족에서 시설 등으로 '외주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RN은 한국의 간호사와 비슷하지만 부여받은 권한은 더 크다. 이은지 기자
필리핀 출신으로 커크브레에서 RN으로 근무 중인 알마(Alma)는 "매일 입소자들의 건강상태를 체크하는 것부터 투약, 상처 치료 등의 의료업무를 하고 있다. 외래진료 일정과 스태프들을 관리하는 것도 우리 일"이라고 말했다.
심야에 긴급상황이 발생할 경우 약물 증량이 더 필요할지, 혹은 비약물적 개입으로 해결이 가능한 사안인지 등도 스스로 판단한다. 부상당한 환자의 응급도를 분류하거나, 입원여부 등을 결정하는 것도 RN의 몫이다. 임종이 임박한 이들의 완화치료 또한 환자를 제일 자주 보는 간호사들이 맡는다.
한국에서는 불법인 '사망선언'도 가능하다. 환자의 호흡이나 동공상태 등 리스트를 면밀히 교차점검했다는 전제 아래서다.
알마는 "다만, 또 다른 간호사가 있을 때 그렇게 할 수 있다. 적어도 2명의 간호사가 필요하다"며
"밤교대의 경우 간호사가 한 명밖에 없다 보니 다른 돌봄종사자(care staff)와 할 수도 있지만, 2명의 간호사가 선언하는 것이 이상적(But ideally two nurses)"이라고 밝혔다.
커크브레 내 요양시설(Aged Care)의 병실은 '1인실'이 원칙이다. 입소 전 사용하던 개인 물품과 사진 등을 곳곳에 비치해 '집'처럼 아늑한 느낌을 준다. 호주의 노인요양시설은 화재 등 유사시를 대비해 대부분 단층으로 지어진다. 보건복지부 공동취재단'에이지드 케어' 안 1인실에 갖춰진 화장실 내부. 복지부 공동취재단단층 건물에 병실은 무조건 '1인실'…한국과 대조적
병실은 무조건 1인실이 원칙이다. 2인실은 아예 없었고, 배우자와 함께 들어온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했다("No sharing rooms, even for couples").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가장 막대한 피해를 입은 국내 노인시설들이 대개 '다인실 구조'임을 새삼 상기하게 된 대목이다.
한국 교포로 올 초 커크브레의 원목으로 부임한 이바울 목사는 "(여기처럼) 일 대 일로 (입소자를) 관리해야 한다. 감염병에 걸려도 각자 격리가 가능한 이유"라며 "한국은 그게 안 되지 않나.
저희 어머니도 요양원에 계셨는데 여섯 분이 (한 방에) 함께 계시니까 다 걸리더라. 결국 코로나로 돌아가셨다"고 안타까워했다.
이 목사는 커크브레가
호주에서 '최고'의 시설(aged care)은 아닐지 몰라도 '가장 평균적인 모델'에 가까울 거라고 밝혔다. 요양시설 입소 시 40만 달러(AUD, 한화 약 3억 5천만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규정돼 있지만 필수요건은 아니다.
커크브레(Kirkbrae) 라운딩을 마치고 떠나기 전 한국팀과 조우한 이바울 목사. 시설의 원목인 그는 호주와 같은 전인적 요양시스템이 한국에도 정착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복지부 공동취재단이은지 기자안젤리카는
"'비영리'란 게 손실을 본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주주들을 위해 수익을 내야 하는 시설과는 매우 다른 모델"이라며 "시설을 보러 온 사람이 그 돈이 없다고 해서 '그럼 피차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하지 않는다"고 했다.
당국의 지원을 받는 입소자를 수용하면 정부가 주는 일부 인센티브도 있다. 그는 "우리(커크브레)는
'좀 더 사회적으로 포용적인 모델(much more of a socially inclusive model)'"이라고 덧붙였다.
기독교 가치관에 기반한 시설답게 '조화로운 공동체(harmonious community)'와 '영적인 필요(spiritual needs)'는 커크브레가 중시하는 또 다른 핵심요소다. 매주 신자들과 드리는 정규 예배 외에도 이 목사는
고인(故人)이 된 입소자들을 함께 기리는 추모 행사(Kirkbrae Resident Memorial Service)를 집도한다.
이 목사는 "(얼마 전) 올 1월부터 8월까지 돌아가신 분들의 영상을 띄우고 가족들을 초청해 기도해드렸는데 너무 좋아하시더라"며 "원하는 유가족에 한해서 이렇게 해드리는데 장례식 후 (허전할 때쯤) 이런 자리가 있으니 위로가 된다고 하신다. 이제는 하나의 패턴이 된 것 같다"고 웃었다.
한국팀이 시설을 막 떠나려 할 때 메인홀에서는 근처 학교 교사·학생들에 의한 마술 공연이 한창이었다. 현지 관계자는 "특별히 봉사라 할 것도 없이 여기서는 워낙 흔한 일"이라고 말했다. '함께' 돌보는 공동체(Caring Community)의 의미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