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명세빈. 코스모엔터테인먼트 제공JTBC 토일드라마 '닥터 차정숙' 삼각관계의 한 축엔 배우 명세빈이 있었다. 모든 걸 다 가졌지만 알고 보면 가족에 대한 결핍이 있는 가정의학과 최승희 교수. 청순의 아이콘이었던 명세빈으로서는 선택하기 쉽지 않은 '내연녀' 역이었지만 그는 직감적으로 '닥터 차정숙'이 자신의 새로운 디딤돌이 될 것임을 알았다.
명세빈이 차분한 목소리로 전한 내용은 솔직했다. 과거 90년대 말 드라마 '순수' '종이학' 2연타로 '첫사랑'의 대명사가 됐지만 이후 그렇다 할 대표작을 내지 못하며 알게 모르게 침체기가 찾아왔다. 본인의 말처럼 꾸준히 연기는 했지만 '뚜렷하게' 보여진 게 없었던 셈이다. 그런 명세빈에게 '닥터 차정숙'은 어쩌면 새로운 희망이자 시작이다.
서인호와의 불안정한 관계 속 딸과의 갈등, 차정숙과의 묘한 대립 구도 등 까다로운 연기들이 포진해 있었다. 결코 쉽지 않은 이 미션들을 명세빈은 차분하면서도 강인한 승희의 얼굴로 하나씩 해치워나갔다. 무엇을 더하거나 뺄 것도 없이 섬세하게 농도를 맞춰 승희 캐릭터를 완성했다. 명세빈의 간절함과 노력이 드디어 빛을 발했다.
인생은 칠전팔기.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르다. 50대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렇기에 '닥터 차정숙'으로 증명한 명세빈의 스펙트럼은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한 때의 '청순' '첫사랑'과 같은 이미지만으로 기억되는 배우가 아니라, 자기만의 색채와 뚜렷한 방향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어렵게 주어진 기회를 통해 명세빈 스스로 증명했기에 더욱 값진 결과다. 다음은 명세빈과의 인터뷰 일문일답.
Q 최고 시청률 18.5%(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2년 만 복귀작으로서는 굉장히 고무적이다A 승희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했는데 부족하고 아쉬운 점을 많이 사랑해주시고, 미워도 해주시고, 불쌍하다며 공감해주시고 그런 많은 사랑을 주신 게 기분이 남다르다.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만난 게 너무 감사하다. '닥터 차정숙'이 인기를 얻어가는 순간에 내가 2030에 느꼈던 그런 반응이 다시 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뭉클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엄)정화 언니가 예상 시청률 7% 이야기했는데 나중에는 배우들끼리 '언니가 너무 조금 이야기했다'고 한 적도 있었다. (웃음) 당연히 그 정도만 되어도 너무 감사하다. 운도 많이 따라줬던 거 같다.
Q 사실 흥행 예상작은 아니었다. 같은 시간대에 비슷한 메디컬 소재의 막강한 시리즈물 드라마도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 이런 성공이 가능했다고 보는지A 팀워크가 좋으면 드라마가 잘 된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 누군가는 그게 아니라고 해도 저는 에너지가 시청자들한테 전해진다고 본다. 대본도 너무 좋았고, 일단 믿고 보는 정화 언니가 한다고 하니 저도 하고 싶었다. 김병철씨도 연기 잘하고 믿음직하면서 든든한 배우다. 그런 게 전체적으로 조합이 잘됐다. 막강한 드라마와 붙었는데 끝까지 이렇게 좋은 시청률이 나온 것도 신기하다. 모든 걸 뛰어넘는 큰 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배우 명세빈. 코스모엔터테인먼트 제공Q 평소 본인 이미지와는 굉장히 다른 '내연녀' 역할이었다
A 제가 승희 역할을 받은 게 거의 막바지였다. 처음 승희를 제안 받은 배우는 아니었다. 막판에 합류했는데 연기를 너무 좋아해주셔서 저도 힘을 내서 열심히 했다. 감독님 요청대로 청순가련한 모습을 배제하고 전문직 여성으로서 도도하면서 시크하고,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승희 성격에 초점을 맞췄다. 제가 캐릭터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언제까지 청순가련하겠냐. 나이도 있고, 배우로서 새로운 색을 많이 표현해서 확장되고 싶었다. 이렇게 흔쾌히 기회를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Q 어찌 보면 승희의 삶이 안타깝기도 하다. 왜 승희는 결혼한 서인호(김병철 분)에게 끌렸던 걸까. 이루지 못한 사랑의 집착? 명세빈 입장에서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면A 승희는 가족에 대한 결핍이 있었고, 아마 인호가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소울메이트 아니었을까. 때문에 인호가 정숙과 하룻밤 사이에 아이가 생겨 결혼을 하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승희는 사과도 받지 못하고 상처가 엄청 커져서 자격지심도 생겼을 거 같다. 집착보다는 '내 가족'을 갖고 싶다는 결핍이 더 와 닿았다. 아마 인호를 더 놓지 못하는 이유가 됐다고 생각한다. 내 결핍도 승희랑 비슷하다. 결혼을 잘 했으면 좋았을 거 같고, 배우로서 아이가 있었으면 엄마 표현도 더 잘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그런 결핍이 있어 성장할 수 있고 또 많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승희가 안타까웠고 그 인생의 타당성을 보려는 생각을 많이 했다.
Q '청순'의 대명사 명세빈을 알지 못하는 대중이 있었다면 이번 계기로 달라졌을 거 같다A 서운함보다는 충격적이었다. 세대가 이렇게 변했는데 나는 무엇을 했으며, 연기를 한다고 했지만 뚜렷하게 보여진 게 없더라. 2030 시청자들이 나에 대해 새롭게 기억하고 알아갔으면 좋겠다. 모자를 사러 갔는데 젊은 직원분이 이번 작품을 통해 알아봐 주셨다. 그래서 내가 자랑도 했다. (웃음) 과몰입한 댓글도 있었고, 미워만 하는 게 아니라 공감도, 연민도 느끼시더라. 승희의 불쌍함에 대해 논쟁이 생기는 거 자체가 굉장히 좋다.
배우 명세빈. 코스모엔터테인먼트 제공Q 승희 성격에서 실제 성격과 잘 맞는 부분도 있었는지A 예전에는 저한테 원하는 이미지가 착하고 청순한 속성이라 제 표현을 확실히 해도 거기에서 엇나가거나 욕을 먹으면 안 될 거 같았다. 그런데 (승희 역할로) 욕을 먹고 나니까 좀 더 자신감이 생겼다. 승희를 그렇게 표현했는데도 수용이 된 거니까 나도 좀 과감해질 수 있는 거 같았다.
Q 원래도 다작을 하는 배우는 아닌데 이제 좀 더 왕성한 활동을 기대해도 좋을까A 어릴 때는 그만큼 체력이 되지 않아서 다작하지 않았다. 역할에 빠져들고, 나오고, 다시 들어가고, 그런 에너지를 다 뿜을 수 있는 체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정점을 찍고 내려오면서 작품이 점점 줄어들기도 했다. 거기서 새로운 캐릭터와 다작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주인공 아니어도 어떤 캐릭터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생각했고, 그래서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만난 거 같다. 앞으로 다작을 하겠다고 약속은 못해도 배우 명세빈으로서 확장되고 깊어지는 캐릭터를 만나고 싶다. 들어오는 여러 가지 캐릭터는 최선을 다하고 싶다.
Q 극 중에선 대립하는 관계였지만 실제로는 엄정화를 많이 의지하고 기댔던 거 같다
A 엄정화 언니와는 둘 다 크리스천(기독교인)이다. 역할은 서로 미워하고 대립적인데 '언니 우리 잘돼야 해요' 내가 그러면 '같이 기도하자'고 하더라. 기도는 제가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같이 응원하고 기도하면서 촬영장에 들어가면 긴장감이 감돌았다. 언니가 잘할 수 있게 마음을 열어줬다. 언니는 정말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행복해 하신다. 서로 '배우자 기도'도 해주고 그런다.
배우 명세빈. 코스모엔터테인먼트 제공A 예전과 지금, 달라진 결혼관이 있다면A 배우자 기도를 하면서 새로운 결혼 가치관을 갖게 된다. 결혼하고 싶다. (웃음) 예전에는 좀 더 좋은 면을 많이 봤다면 이제는 안 좋은 면을 많이 보더라도 그걸 수용하고 이해하는, 서로 인격적으로 기다려주고 바라봐주는 사람이 좋지 않을까 싶다. 한 사람으로서 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봐줄 수 있고, 나쁜 점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좋다. 딱 '차정숙'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Q 최근 들어 여자 배우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여러 장르 작품들이 두드러진다A 어쩔 수 없이 육체적으로 나이가 들 수밖에 없다. 소비성이 강한 게 아니라 4050 여자 배우들이 요즘 드라마에서 좋은 성과를 내면서 이런 문화를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거 같다. 또 다른 세대가 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배우로서 어떤 부분은 아쉽지만 그런 아쉬움이 열심히 하게 하는 동력도 된다. 이 시기에 할 수 있는 게 또 있으니 열심히 작품을 해야겠단 생각이다.
Q 어느덧 데뷔 30년 차에 가까워지고 있다. 지난 연기 인생을 돌이켜보면A 배우가 꿈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됐고, 생각지도 못하게 인기도 얻어봤다. 그 때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지금은 이 일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 현실의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한데 되게 만족한다. 나중에는 정원이 있는 시골집에서 꽃나무를 키우면서 살고 싶다. 역할은 코믹한 캐릭터나, 겉으로는 소심해 보이는데 뒤로는 보스 같은 이중적인 캐릭터도 해보고 싶고, 진한 중년 멜로도 한 번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