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황진환 기자'연장근로 개편안'을 두고 윤석열 정부가 갈팡질팡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며 '유체이탈 화법'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고, 여당에서는 '가짜뉴스', '프레임'을 운운하며 남 탓으로 몰아가는 모양새다.
지금도 '주64시간' 가능한데 갑자기 '주60시간'?
"연장근로를 하더라도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실 안상훈 사회수석이 지난 16일 전한 윤 대통령의 생각이다. 고용노동부가 최대 주 69시간까지 연장근로가 가능한 '근로시간 제도 개편방안'을 꺼내놓은 지 열흘 만에 대통령실에서 급제동을 건 셈이다.
문제는 현행 제도에서도 최대 주 64시간까지 연장근로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기존 노동시간 법·제도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여론에 떠밀려 노동부의 발표만 뒤집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지금도 탄력근무제를 도입해 '3개월 이내 및 6개월'로 단위기간을 설정할 경우, 최대 근무시간은 특정한 주 52시간(최대근무시간)과 12시간(연장근로시간)을 합쳐 64시간까지 근무가 가능하다.
주 69시간이든, 60시간이든 결국 '문재인 정부가 도입한 주52시간제보다 일하는 시간을 늘리겠다'는 방침만은 고수하고 있는 윤 대통령의 지시에 시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민주노총이 9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노동시간개악저지 윤석열 정부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
서울 마포에 거주하는 직장인 김모(60)씨는 "외국에서는 오히려 근로시간을 줄이는데, 어떻게 대한민국은 늘리는 것인가"라며 "정부가 사장, 회장 등 부자들 편만 들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현 제도에서도 최대 64시간까지 가능한 점들에 대해 "그것까지도 줄여야 한다. 저같은 '월급쟁이'들한테 일을 늘린다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나"라고 덧붙였다.
의류공장에서 일한다는 50대 여성 A씨는 "윤 대통령이 (현 제도를) 설마 몰랐겠느냐"며 "다만 이해가 잘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성공회대 하종강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는 "정부는 일을 더 하면서라도 더 많은 임금을 받기를 바란다는 게 젊은 세대들의 요구라고 파악했는데, 사실은 거기서부터 어긋난 것"이라고 말했다.
하 주임교수는 "정확한 요구는 노동시간 자체를 늘려달라기보다 주 40시간 등 정해진 노동시간 내에서 융통성을 발휘해달라는 것"이었다며 "정부가 너무 단순하게 젊은 세대들의 요구를 이해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민주노총이 9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노동시간개악저지 윤석열 정부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유체이탈' 尹, '프레임' 탓 與
더 황당한 지점은 정책이 발표되고 뒤집히고 수정되는 일련의 과정에서 윤 대통령과 여당인 국민의힘이 보여준 행동이다.
윤 대통령은 노동부의 개편안에 "입법예고된 정부안에서 (근로시간에) 적절한 상한 캡을 씌우지 않은 것에 대해 유감으로 여기고 보완을 지시했다"고 안 수석은 전했다.
얼핏 윤 대통령이 노동부에서 잘못 준비한 정책을 수정하도록 지시한 것처럼 비친다. 하지만 오히려 윤 대통령 스스로 이번 개편안 자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시민들의 반발에 대한 책임을 노동부로 떠넘겼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6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근로시간 제도 개편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통상적으로 정부의 정책은 부처와 대통령실 산하 각 담당 비서실 간 긴밀한 협의 하에 진행이 되고, 중요 정책들은 대통령에게 보고·검증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근로시간 유연화' 정책은 발표하기에 앞서 5개월에 걸쳐 전문가 기구의 자문을 받는 등 정부가 지난 1년 동안 공들여 준비했던 중요 노동 정책이다.
올해 신년사에서 "대한민국의 미래와 미래세대의 운명이 달린 노동, 교육, 연금 3대 개혁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며 가장 먼저 노동 개혁을 강조했던 윤 대통령이다. 첫 국무회의에서도 "개혁 과제와 국정과제에 대해 구체적인 실행 방안과 로드맵을 만들고 그 이행 과정을 수시로 저와 대통령실에 보고해주기 바란다"며 '직접' 정책을 챙기는 모습을 과시하기도 했다. 주요 국정과제인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을 이제 와서 윤 대통령이 뒤늦게 '모르쇠'해도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이유다.
더구나 장시간 노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던 장본인이 바로 윤 대통령 자신이다. 대선 후보 시절 남긴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어록은 이번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의 '뿌리'가 됐다.
윤 대통령 집무실 책상에 놓여있다는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 팻말의 문구가 다시금 무색한 상황이다. 앞서 이태원 참사 당시 관계자들을 질타하고, 정순신 국가수사본부장 사퇴 파동에서 인사 검증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정작 최종 책임자인 자신이나 측근들의 책임에는 침묵해 비판받았던 '유체이탈 화법'은 이번에도 반복됐다.
국무회의 주재하는 윤석열 대통령. 연합뉴스이런 가운데 여당은 논란의 책임을 윤 대통령도, 관련 부처도 아닌 '일부 언론'의 책임으로 은근슬쩍 밀어내려 시도하고 있다.
국민의힘 임이자 의원(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여당 간사)은 지난 16일 열린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향' 토론회에서 "개편 취지가 비현실적 가정을 전제로 한 가짜뉴스와 소통 부족 등으로 장시간 근로를 유발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면서 기자들에게 "69시간 프레임에 빠져서 갇혀 있다"고 주장했다.
마치 여당이 보기에 정책 자체에는 문제가 없는데, 언론의 '가짜뉴스' 등으로 이번 논란이 불거졌다는 입장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는 여성 김모(62)씨는 "먼저 직장인 등 근로자의 의견을 먼저 충분히 들어야 하는데, 정부에서 먼저 발표해버렸다"며 "그러니까 국민들은 맨날 이리 실망하고 저리 실망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노동부 장관이 할 일을 못 해서 그런 것 아닌가"라며 "지금도 64시간까지 할 수 있다면, 굳이 5시간을 늘릴 필요도 없는 것 아니었나"라고 했다.
중앙대 이병훈 사회학과 교수는 "(대통령실과 노동부가) 전혀 입이 맞춰지지 않은 모습으로 이런 중차대한 개혁을 한다고 하니 국민들은 뜨악하고 당황스러울 것"이라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이어 "근본적인 문제는 노동개혁을 추진하면서 정작 당사자인 노동자 대표들과는 사회적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이라며 "모든 근로자들의 노동시간을 개선하는 차원에서 문제를 접근해야 하는데, 자꾸 MZ세대의 여론에만 민감해하는 경향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사실 중노년층이나 여성, 비정규직, 중소사업장 노동자 등이 장시간 노동에 많이 노출돼 있다"며 "MZ세대 여론에만 민감해하는데, MZ세대 안에 다양한 계층이 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