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키우다 보니 10년이 훌쩍"…일하고 싶은 여성들

[초저출생: 미래가 없다]

편집자주

작아지는 대한민국을 피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덜 작아지도록, 더딘 속도로 오도록 대비할 수는 있습니다. 초저출생은 여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녀 모두의 일입니다. 국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개인, 모든 세대의 일입니다. CBS는 연중기획 '초저출생: 미래가 없다'를 통해 저출산 대책의 명암을 짚고, 대한민국의 미래와 공존을 모색합니다. ▶birth.nocu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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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내 꿈을 포기시켰어요"

김모(52)씨는 법대를 졸업하고 외국계 기업에서 일했지만, 임신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이혼 후 두 아이를 맡아 길렀고 생계를 위해 영어학습지 강사, 제과점 매니저로 짧게 일했다.
원하는 일을 찾기 위해 50대에 접어들면서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고 구직 활동 중이다. 그는 "애 키우는 것보다 자아실현이 진짜 하고 싶었다. 외국에서 살고 싶었다. (이런 꿈을) 사회가 포기시켰다"고 말했다.
전정현(39)씨는 청소년 기관에서 4년 7개월을 일하다 임신 6개월 차에 일을 그만뒀다. 임신소양증이 생기면서 가려움증에 시달려 직장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다.
두 살 터울의 세 아이를 기르면서 원래 일하던 곳에서 파트타임으로 잠깐씩 일했지만 배가 불러오면 일을 쉬고 아이가 조금 자라면 다시 나가는 걸 반복했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은 하지 못하고 10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고 했다.
두 여성은 16년 간격으로 첫아이를 출산했지만 세월의 격차에도 임신·출산·육아로 인한 여성경력단절은 여전했다.
여성가족부가 지난 5일 발표한 '2021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따르면 '경력단절 여성'은 2019년 169만 9천명에서 2020년 150만 6천명으로 감소추세에 있지만, 여전히 기혼여성17.6%력단절을 겪고 있다.
임신·출산·육아로 인해 노동시장에서 밀려나는 여성들의 숫자는 우리나라의 직장 내 성평등 수준을 여실히 보여준다. 경력단절 문제와 함께 남성과 여성 간 임금 격차, 여성 임원에 대한 유리천장 효과 등은 여성이 출산기피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임신해도, 아이를 낳아도 계속 일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에 대처하는 정부의 자세는 안온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정부의 경력단절 여성 정책이 그렇다. 경력단절 여성을 재고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애초에 경력단절 여성이 나오지 않도록 강력한 정책을 펼치는 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여성들이 경제활동에 많이 참여하고 경력단절 가능성이 적은 사회일수록 아이를 많이 낳는다'란 명제를 한국 사회가 깨달아야 한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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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냐 회사냐'…갈림길에 선 여성들

"임신 36주 차쯤 팀장님이 대놓고 얘기했어요. '출산 휴가 마치고 돌아오면 계약을 연장해 주겠다. 근데 육아휴직을 쓰겠다고 하면 계약 연장은 없다'라고요."
대학 졸업 후 미국에서 2년 정도 유학을 한 고모(37)씨는 귀국 후 국제학교에서 3년 넘게 일하고 정부 기관에서 2년 정도를 일했다. 첫아이임신하고 직장에서 버티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일을 그만뒀다.
3살, 6살 두 아이를 키우는 고씨는 가끔 생각한다. "육아를 포기하고 아이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재취업 준비를 시작했더라면 조금 더 많은 기회를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내 직장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직업 기재란가정주부라고 쓰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임신·출산·육아를 바라보는 사회의 박한 시선 속에서 여성들은 '육아냐 직장이냐'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상당수의 여성들이 어쩔 수 없이 일터를 포기하고 있다.
    
각종 통계가 이를 뒷받침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여성 고용률은 20대 후반 68.7%, 30대 초반 64.5%, 30대 후반 58.6%로 떨어지다가 40대 초반 61.4%로 소폭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다.
20대 초에는 경제활동 참가율이 가장 높다가 여성의 결혼출산이 맞물리는 시점에 현저히 낮아지며, 육아기가 끝나는 시점에 이르러 서서히 상승하는 'M자' 형태를 보였다.
반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여성 평균 경제활동률은 20대 후반 72.7%, 30대 초반 72.2%, 30대 후반 72.4%로 결혼·육아기에 접어든 뒤에도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대기업에 다니는 허모(37)씨는 육아휴직을 쓰고 복직하는 데까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육아휴직에 대한 인식까지 변한 건 아니라고 지적했다.
허씨는 "복직 첫날 상사가 '앞으로 욕심내면서 커리어적으로 발전할 건지 평가에 연연해하지 않을 건지' 둘 중 선택하라고 했다""이제 직장에선 아기 엄마란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구나, 아이를 낳고 돌아오니 회사도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고 토로했다.
이어 "중견기업에 다니는 친구네 회사엔 아직까지 육아휴직을 쓴 여직원이 거의 없다"며  "아직 현실이 이렇다"고 씁쓸해했다.
지난 12일 노동시민단체인 직장갑질119가 내놓은 '모성보호 갑질 보고서'에 따르면 육아휴직자 3명 중 1명이 육아휴직 후 직장에 제대로 복귀하지 못했다.
    

"10년이나 쉴 줄은"…취업시장에서 밀려난 느낌

"다시 금방 나갈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얼른 애들 키워놓고 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아르바이트 같은 것도 계속 알아는 봤는데 잘 안됐어요." 
세 아이를 키워낸 전씨10년이란 시간이 이렇게 흐를 줄 몰랐다고 했다.
여성들은 단절 기간이 길어질수록 취업이 어렵다는 걸 체감한다고 말했다. 고씨"경력단절 기간이 5년 정도 되다 보니 시간제 상담 일에 지원해도 연락이 오질 않는다""면접 기회조차 받지 못하는 걸 보니 박탈감도 들고 점점 취업 시장에서 밀려나는 느낌이 확 든다"고 말했다.
유치원 교사로 8년을 일했던 박모(32)씨 "임신하고 일을 그만뒀다. 단절 기간4년 정도 되니 일이 하고 싶어 어린이집 두 군데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연락이 안 왔다. 그러던 중 둘째 임신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이어 "애를 다 키워놓고 다시 도전하자니 나이가 너무 많은 것 같다. 다시 취업하면 잘 할 수 있을지 무섭다"고 했다.
이처럼 자녀 양육은 노동시장 재진입에 큰 영향을 미친다. 엄마주 양육자라는 고정관념이 뿌리 깊이 박힌 사회에서 여성들의 일하고 싶은 욕망은 후순위로 밀리기 일쑤다.
두 아이를 기르면서 심리학 석사까지 마친 고씨"다음 달에 시험이 하나 예정돼 있는데 아이 아빠가 그날 일을 해야 한다. 당장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 시험을 못 칠지도 모른다"며 속상해했다. 해당 시험은 1년에 두세 차례 기회가 주어진다고 했다.
박씨"밖에서 일하고 싶어서 카페나 편의점, 야쿠르트 아줌마 일자리까지 알아봤지만 아이 등하원 시간이랑 맞지 않아 할 수가 없었다"며 답답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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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
"여성들의 경력단절이 되는 제1원인이 육아 때문인데 육아휴직이나 가족 돌봄 등 기존 제도가 있어도 그 제도를 활용할 수 있는 여성들이 소수인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아이를 낳으면 해고 또는 불이익이 있다는 걸 예측할 수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애를 많이 낳길 기대하는 건 굉장히 이상한 일"이라고 했다.
경력단절 여성들의 일자리 연계를 도와주는 플랫폼 위커넥트 김미진 대표"회사 내부 통계를 봤을 때 단절 기간에 따라 취업이 어려워진다는 명확한 인과관계는 없지만 분명한 추이는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단절 기간으로 여성을 보기보단 개개인의 잠재력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현재 상태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역량이나 능력이 훨씬 중요하단 생각에 경력단절 여성을 '경력 보유 여성'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경력단절 여성 위한 제도…좀 더 정교해야

여성새로일하기센터 홈페이지 캡처여성새로일하기센터 홈페이지 캡처
경력단절 여성을 위한 정부의 예산늘어나는 추세다. 여성가족부는 올해 새일여성인턴 지원인원, 경력단절 예방 전담인력 확충 등 경력단절 예방 서비스를 확대하기 위해 117억 원의 예산을 증액해 702억 원을 편성했다. 경력단절 여성의 재취업을 지원하는 '새일인턴운영' 내년도 사업 예산은 236억 원에서 259억 원으로 증액됐다.
하지만 정작 경쟁력 있는 재교육 프로그램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씨는 "정부의 경력단절 여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찾아보니 캘리그래피, 기본 엑셀 이런 강좌가 대부분이었다""도움이 안 돼 민간에서 돈을 주고 따로 교육을 이수했다"고 답했다.
이어 "정부가 그 정도 예산이 있다면 개인이 조금 더 경쟁력 있는 지원자가 되기 위한 맞춤형 방안을 고민하고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프로그램은 오히려 여성의 경쟁력을 저하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다.
위커넥트 김 대표도 "정부 기관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진행하는 교육이나 연계 직장 취업 30대 여성이 기존 경력을 살려 계속 일할 수 있기엔 어려운 측면이 있다"라며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내가 했던 일을 계속하면서 그곳에서 성장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어린 자녀를 맡길 곳이 없어 일자리를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는 경우도 많다. 고씨는 둘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어렵게 입소시켰다. 맞벌이 가정이나 구직활동을 하는 경우라면 입소대기 우선순위에서 가점이 붙지만 고씨는 아이를 돌봐야 했기 때문에 구직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연히 입소 순번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없다.
고씨는 "일을 하지 않으면 점수가 낮아서 원하는 어린이집에 보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아이가 어린이집에 적응을 잘하고 잘 다니기 시작해야 엄마는 직장을 찾을 수가 있는 건데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했다.
전씨는 파트타임 보조교사로 일할 당시 9살 첫째 아이를 긴급 돌봄에 맡긴 적이 있다. 그는 "돌봄 신청을 한 아이가 우리 아이뿐인 날이었는데 돌봄 교사가 아이에게 '너희 엄마는 선생님인데 넌 안 돌봐주시니'라고 했다더라"라며 "나오지 말란 건가 싶어서 일주일을 친정 부모님네 맡겼다. 제도보단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라고 답답해했다.
경력단절 여성이 어렵게 재취업한다 해도 비정규직이나 저임금 일자리가 대부분이라는 점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여가부에 따르면 지난해 여성의 경력단절 전 임금218만 5천원이었지만 경력단절 후 임금191만 5천원으로 87.6% 수준까지 하락했다.
결혼 전 회계 업무를 했던 정모(35)씨"일할 땐 잘한다는 소리도 들었고 아이 낳고도 금방 어디든 골라 갈 줄 알았는데 하향지원한 곳에서만 연락이 오더라. 원래 받던 연봉보다 2천만~3천만 원 낮은 에서만 연락이 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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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단절 여성도 '생계부양자'란 인식 필요

경력단절 여성 정책의 사각지대에 있는 여성들에 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단 지적도 나온다. 경력단절 여성이 한부모 가정을 부양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가정 전체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
 
허 입법조사관은 "고용시장에 여성들이 진입할 때 여자들은 결혼하면 당연히 생계부양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지, 여성들이 단독 생계부양자일 거라는 생각은 덜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가부장적인 사회다 보니 여성들은 주로 가사 전담자 또는 돌봄 제공자로 보는데 근로 기회를 얻기도 쉽지 않고 돌봄에 있어서도 혼자 다 떠맡아야 하는 한부모 가정의 경력단절 여성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50대 김씨의 경력단절과 이혼, 재취업 노력을 보며 자란 딸 임모(26)씨는 "엄마가 나를 가져서 직장을 잃고 결혼 생활에 메이게 된 게 아닌가 생각했다""엄마에게 나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지 않을까 일종의 부채감이 있다"고 털어놨다.
이어 "엄마가 경력단절이 되고 이혼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된 적이 없다. 10년이 지나도 별반 나아질 것 같지 않기에 내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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