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자료사진)
대한민국 사회에서 '미투'(성폭력 고발)의 역사는 깊다. 올해 들어 여검사의 미투를 필두로 각계에 봇물이 터졌지만 한국 여성들은 '미투'라는 용어가 쓰이기 훨씬 전부터 성폭력을 고발하고 처절하게 고통을 호소해왔다.
법률적으로 '1호 미투'라면 성폭력 가해자와 6년간의 다툼을 벌인 서울대 우 조교 사건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현재, 우 조교가 겪었던 고통과 2차 피해는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느슨한 법망은 성폭력 사각지대를 만들고, 용기를 낸 피해자들을 코너로 몰기도 한다.
◇ 재취업 실패에 명예훼손 낙인까지…우 조교의 악몽은 반복된다'우 조교 사건'으로 불리는 서울대 신정휴 교수 사건은 우리나라 최초로 직장 내 성희롱을 문제삼아 제기된 민사소송 사건이다. 1992년~1993년 서울대 화학과 실험실에서 1년간 계약직으로 일했던 우 조교는 신 교수로부터 상습적인 신체 접촉을 당하다 분명한 거부 의사를 표현한 뒤 재계약에서 탈락했다. 이에 우 조교가 대자보를 붙여 신 교수의 성폭력 사실을 고발하고 임용 탈락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1993년 10월 첫 민사소송이 시작됐는데, 가해자인 신 교수가 먼저 우 조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서 시작된 맞고소 성격이었다. 대법원을 거친 6년간의 기나긴 소송전 끝에 신 교수에게 500만원 지급 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우 조교가 감내해야할 고통은 너무 큰 것이었다.
당시 사건에 실무를 담당했던 이수연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조사과 여성인권팀장은 우 조교가 겪었던 2차 피해 문제들이 25년이 지난 이후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우 조교는 서울대 재계약에 탈락한 뒤 다른 학교에 재취업하려고 했지만 끝내 취업에 실패했다.
이 팀장은 "우 조교가 재취업에 실패한 것은 당시에는 잘 이슈화되지도 않았다"며 "마찬가지로 지금 피해자들도 업계에 알려지면 나쁜 꼬리표가 붙어 고용상 불이익을 당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당시 신 교수 측은 우 조교에게 먼저 '명예훼손'으로 법적 소송을 걸었다. 우 조교의 고발 순수성을 훼손하려 하면서 지속적으로 2차적 고통을 가했다.
심지어 대법원 유죄 판결 후 몇년이 흐른 뒤에도 이런 공격은 계속됐다. 신 교수와 친분이 있던 정운찬 전 총리는 2002년 10월 한명숙 당시 여성부 장관과 면담하면서 "재계약에서 탈락한 우 조교의 앙심에서 비롯돼 억울한 사람이 매장된 사건이었으며, 당시 우 조교를 지원한 여성운동이 신중하지 못했다"고 발언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처럼 우 조교는 6년간 이어진 소송전과 취업 실패로 심리적으로 큰 고통을 받았고, 현재는 '조용히 살고 싶다'며 외부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악성댓글 등으로 협박과 상처를 받고, 명예훼손으로 소송에 시달리는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실명을 걸고 미투에 나선 피해자들은 신상공개는 물론 살인 협박 같은 공격에 시달리고 있다. 또한 언제든 '명예훼손'이나 '무고'로 고소당할 수 있는 처지에 있다.
◇ 2차 피해 당해도 속수무책…"법적 보호장치 만들어야"제2, 제3의 우조교로 세상 앞에 나선 피해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세상 앞에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 5일 오전 서울 서초구 변호사회관에서 열린 이윤택 감독 성추행 및 성폭행 피해자 16명 기자회견 '미투 그 이후, 피해자가 말하다!'에서 피해자인 김수희(왼쪽부터), 홍선주, 이재령 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자료사진)
이윤택 연출가의 성폭력을 폭로한 홍선주씨는 5일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을 고백한 후 나를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고 가족과 극단의 신상까지 노출돼 가슴 아픈 시간을 보냈다"며 "왜 이제서야 말하냐고 묻지 마시고 이제라도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연극인 이재령씨도 "미투 운동으로 어렵게 말을 꺼낸 후 '그동안 왜 말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많이 받았다. 대답은 '그때는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며 힘들었던 심경을 토로했다.
피해자에게 화살을 돌리는 왜곡된 시선을 거둠과 동시에 제도적인 보호 장치 마련도 시급하다.
이수연 팀장은 "인사상 불이익이나 가시적으로 드러난 2차 피해가 아니라 카더라 통신, 소문, 음해, 왕따 등 실체를 확보하기 어려운 2차 피해들은 인권위에서도 시정권고를 하기 어렵다"면서 "성적 언동이나 여성비하, 괴롭힘 등도 조사대상에 포괄할 수 있는 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명예훼손이나 무고와 같은 가해자들의 반격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피해자들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을지 과제가 남아있다"며 피해자들에 대한 법률적 조력과 보호장치 마련 필요성을 강조했다.
여성계에서는 이번 미투를 계기로 양성평등기본법, 국가인권위원회법, 남녀고용평등법으로 산재돼 있는 성희롱 관련 법을 재정비하고 피해자 보호 업무 등을 총지휘할 수 있는 '콘트롤 타워'가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영순 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는 "여성가족부, 고용노동부 등 각 부처는 현행 있는 법률도 제대로 집행을 못하고 있고, 관련 업무는 부수 업무 취급을 받고 있다"며 "법령 재정비와 함께 대통령 직속으로 관련 업무를 총괄할 수 있는 기구를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