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구의 한 아파트에서 이웃 주민에게 일본도를 휘둘러 숨지게 한 혐의로 경찰에 긴급 체포된 백모(37)씨가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지난해 8월 1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주변에서는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오는 게 아니니까 건강 관리하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게 쉽지 않아요" 설 연휴를 앞둔 지난달 23일 CBS노컷뉴스는 이른바 '일본도 살해 사건' 피해자의 아버지 김모(73)씨와 어머니 박모(68)씨를 서울 은평구의 한 카페에서 만나 사건 이후 완전히 바뀐 유가족들 일상과, 새해 바람도 들었다. 사건 발생 후 6개월이 지났지만, 유가족들의 시간은 여전히 믿고 싶지 않은 그날에 멈춰져 있었다.
남겨진 유가족들의 고통…"악마 같은 가해자에 사형 집행해야"
지난해 7월 김씨와 박씨의 외동아들인 김모(43)씨는 서울 은평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이웃 주민 백모(37)씨가 휘두른 일본도에 무참히 숨졌다. 검찰이 백씨에게 사형을 구형할 만큼 잔혹한 범행이었고,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백씨가 '중국 스파이를 처단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황당한 주장을 반복하면서 사건 자체가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런 백씨의 모습을 마주하며 김씨와 박씨는 정신적 트라우마로 인해 심리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했다. 고인이 된 아들 생각이 날 때마다 교회를 찾아 기도도 계속했다. 박씨는 "아들이 숨진 뒤 단 한 번도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심리치료와 약물치료를 밤낮으로 받으면서 살고 있다"며 "울면서 기도하면 조금 나아지긴 하지만 (아픔을 이겨내는 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피해자의 첫째 아들인 김모(10)군은 아직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 사건 이후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숨진 김씨는 사건 당일에도 김군과 놀아주다가 잠시 담배를 피우러 나간 사이 참극을 당했다. "아빠가 보고 싶지 않느냐"는 가족들의 물음에도 김군은 "글쎄"라며 답변을 얼버무린다고 한다.
박씨는 "우리 큰 손자는 장례식을 다 지켜봐서 상황을 알 텐데 아빠에 대한 언급을 한 마디도 안 한다"며 눈물을 보였다. 박씨는 자신의 왼쪽 가슴에 손을 얹으면서 "여기에 아빠를 숨겨 놓은 것"이라며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아빠가 사라졌는데도 그 어린 것이 아빠에 대한 말을 안 한다"고 말했다.
피해자의 아버지 김씨는 최근 모친상까지 겪으면서 건강이 더욱 악화됐고, 과다하게 분비된 위산으로 위벽 일부가 손상됐다는 병원 진단을 받았다. 김씨는 "우리가 그런 고통까지 당해가면서 살고 있다"며 "우리 가족의 바람은 재판부가 가해자에게 꼭 사형을 선고해서 그 사람을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건 이후 법무부 장관과 대법원장, 대통령실 등에 탄원서를 수차례 보내며 백씨에 대한 사형 선고와 형벌 집행을 촉구하는 활동도 이어오고 있다. 남은 가족들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전방위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번 달 13일에 열릴 백씨에 대한 선고기일을 앞두고 재판부에 보내려고 작성해둔 '엄벌 탄원서'를 기자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일본도 살인사건' 피해자 부모들이 직접 자필로 쓴 엄벌 탄원서. 독자 제공김씨의 자필 탄원서에는 "생명은 하나이고 (백씨는 유가족에게) 되돌릴 수 없는 피해를 줬다"며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이 저린다"고 적었다. 탄원서에는 "망자는 가장 재밌게 살 나이에 꿈도 펼치지 못하고 억울하게 숨졌다"며 "어린 손자와 며느리를 볼 때마다 억장이 무너진다. 어떻게 고통을 견디며 긴 세월을 살아갈지 마음이 아려온다"는 문장도 담겼다. 아울러 "저 악마(백씨)는 무방비인 사람에게 칼을 포악하게 휘둘렀고 피를 흘리며 고통 속에 죽어간 아들을 생각하면 피를 토하는 심정"이라며 "살인마는 꼭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했다.
지구대원∙주민들도 헤어나오지 못한 그날의 아픔
'일본도 살해 사건' 가해자 백모씨. 연합뉴스서울 은평구 주민들도 그날의 아픔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간 경찰청은 지난해 8월부터 9월까지 2개월 간 소지 허가가 이뤄진 도검 8만 2641정 중 7만 3424정(88.8%)에 대해 허가 후 범죄 발생 여부 등을 조사했다. 정신질환자의 도검 소지를 원천 차단하는 '총포∙도검∙화약류 등의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총포화약법) 개정안'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됐지만, 사건 현장 주변에서 만난 주민들은 유사한 사건이 재발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었다.
현장 인근에서 디저트 가게를 운영 중인 박지예씨는 "여기 사는 주민들은 사건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상처일 것"이라며 "이 동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 절대 상상하지 못한 만큼 주민들이 사건 이후 밖으로 나오길 꺼려하고 많이 위축돼 보인다"고 말했다.
슬하에 두 아들을 둔 이혜민(40)씨는 "(사건 발생 전) 가해자가 놀이터에서 마주친 아이들에게 "아저씨랑 칼싸움하자"고 말하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사건 이후) 아이들이 놀이터, 공원에서 놀 때마다 주변을 엄청 경계하게 됐다. (아이들에게는) 이상한 사람이 보이면 일단 그냥 도망가라고 했다"고 말했다.
10세 아들을 둔 오모씨는 "사건이 발생한 뒤 3~4달은 사건 현장 쪽으로도 가지 말라고 했다. (지금도) 놀이터에서 아이가 놀 때는 계속 지켜보려고 한다"며 "사건이 발생한 뒤 2주 정도는 경찰 순찰차가 많이 다녀서 조금 안심은 됐다"고 했다.
은평구 내 경찰서 지구대와 파출소에는 사건 이후로 도검 소지 관련 오인 신고도 종종 접수된다고 한다. 서울 은평경찰서 한 지구대 관계자도 "목검을 들고 가는 사람이 있다는 신고를 접수해 현장에서 물체를 확인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다른 지구대 관계자는 "일본도처럼 보이는 긴 물체를 들고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해 출동한 적이 있다"며 "현장에서 물체를 확인해보니 골프채가 담긴 가방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사건이 발생한 후 불안해하고 (도검을) 의심하는 시민들이 많아진 것 같다"고 밝혔다.
한편 검찰은 지난달 21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백씨의 결심공판에서 "피고인이 피해자를 처단한다는 분명한 의식과 목적 하에 살해 행위를 했다"며 사형을 구형했다. 검찰은 "유족들이 입은 고통이 막대함에도 피고인이 중국 스파이를 처단했을 뿐이라며 반성하지 않고 있고 피해 회복 절차도 밟지 않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