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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일간의 '생지옥'…여자는 한낱 '재물'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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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한명기에게 듣는 '남한산성' 밖 병자호란 이야기 <상>

엄동설한이 몰아친 1636년 12월 조선에 청나라 대군이 침입합니다. 47일 만인 이듬해 1월 조선의 패배로 끝난 '병자호란'은, 영화 '남한산성' '최종병기 활' 등에서도 다뤄졌듯이 당대 사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죠. 병자호란 연구의 권위자로 첫손에 꼽히는 역사학자 한명기(명지대 사학과) 교수가 들려준 '남한산성' 밖의 병자호란,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편집자 주]

영화 '최종병기 활' 스틸컷(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전쟁은 언제나 힘없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가장 가혹한 법이다. 병자호란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한명기 교수는 23일 CBS노컷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당시 참상을 아래와 같이 전했다.

"(문신 나만갑이 병자호란의 경험을 기록한) '병자록'이나 그 이후 기록들을 보면,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될 때 청군은 젊은 여성들을 잡는 데 혈안이 됐어요. 여성들을 사로잡아 끌고가기 위해 그녀들이 데리고 있던 아이들을 죽이기까지 했죠. 아이가 죽은 엄마의 젖을 빨고 있었다는 처참한 기록도 있습니다."

그는 "당시 청군의 능욕을 피하기 위해 강화도에서 도망치던 여성들이 바다로 워낙 많이 뛰어들어서, 바다 위로 수많은 머릿수건이 꽃잎이나 낙엽처럼 떠다녔다는 이야기가 있다"며 "전쟁은 항상 그래 왔다. 여성들, 아이들, 노인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본다"고 전했다.

요새 강화도가 함락되자 당시 인조 정권은 남한산성에 몸을 숨긴다. 산성 밖에 남게 된 민초들의 삶은 어땠을까. 한 교수는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며 말을 이어갔다.

"청나라 실록에 나타난 기록들에 따르면, '생업에 계속 종사하거나 적대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 죽이지 않는다. 다만 청군을 피해 도망치거나 저항을 할 때는 잡아서 머리를 깎는다'는 식으로 대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이런 것을 보면 남한산성 이북 지역에서 청군에 노출된 사람들은 대체로 몹시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고 볼 수 있죠."

◇ "만약 청군이 인구 밀집된 경상도·전라도까지 남하했다면…"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사진=자료사진/노컷뉴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왕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을 전하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당대 지배층 위주의 기록이 남을 수밖에 없으니까"라는 것이 한 교수의 설명이다.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한 뒤에 워낙 많은 조선인들이 끌려가고 하니까, 어떤 노파가 인조의 행차 무렵 '내 가족들이 모두 죽게 된 것이 누구 탓이냐'면서 푸념했다는 기록이 있죠. 어쨌든 지배층을 대놓고 욕했다든지 하는 자료는 찾기 어려워요. 다만 그랬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해 보입니다."

병자호란으로 인해 청나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는 5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대해 한 교수는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고 분석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최명길이 산동 지방 명나라 장수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 편지에 청나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가 50만 명이라고 썼죠.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고 명나라에게 과장해 이야기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려운 이유죠."

그는 "조선인 포로는 10만 명 안팎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9년 전 정묘호란 때 평안도 지방에서 청나라에 잡혀간 조선인이 수만 명이었으니까"라며 "병자호란 때는 조선군이 제 역할을 못하고 일방적으로 밀렸으니, (포로 규모가) 정묘호란 때 이상의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만약 인구가 밀집돼 있는 경상도, 전라도 지역까지 남하했다면 더 많은 포로가 생겼을 것"이라며 "전쟁이 47일 만에 속전속결로 끝났기 때문에 서울과 경기 이북 지역 사람들이 주로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 갔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40년 만에 탈출했건만"…나라로부터 버림받은 조선인들의 기막힌 사연

영화 '남한산성' 스틸컷(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한 교수는 병자호란을 연구한 저서 '역사평설 병자호란'(푸른역사)에서 청나라를 탈출해 조선으로 향했던 포로 안단(安端)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1675년(숙종 1년) 봄, 안단은 압록강에 도착한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1636년 청군에게 끌려가 노비가 된 뒤 무려 40년 만이었다. 북경을 출발해 심양을 거쳐 만주 벌판까지 가로지르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탈출을 눈앞에 둔 안단은 의주의 조선 관리들에게 "입국하게 해 달라"고 호소한다. 하지만 그의 호소는 외면당했고, 더욱이 조선 관리가 의주에 와 있던 청나라 칙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 탓에 그는 다시 청나라로 압송된다.

나라로부터 버림받은 백성들의 허망하고 기막힌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다. 청나라에 끌려가 노비로 전락하고, 명나라와 벌이는 전쟁터에서 총알받이가 되고, 살아서 고향에 돌아오더라도 절개를 잃었다며 '화냥년' 낙인을 찍던 때, 조선인들은 그 극단의 시대를 살아내야만 했다.

한 교수는 "청나라가 만주에서 군사적·정치적으로 급속히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소수민족이었기에 한계가 있었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와 전면 대결을 하기에는 군사력·노동력 등에서 열세였습니다. 그때 명나라 인구는 이미 1억 명을 넘겼는데, 청나라 만주족은 200만 명이 안 되는 상태였으니까요.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은 조선 침략 이전에도, 명나라를 공격하면서 한족을 대거 포로로 잡아오는 데 굉장히 관심이 많았죠."

◇ "인조 정권의 잘못된 출발, '이괄의 난' 때 이미 싹수 드러내"

영화 '남한산성' 스틸컷(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한 교수는 "이러한 추세가 이어지면서 청나라가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도 조선에서 포로를 잡아들이는 상황이 재현됐다고 보면 된다"며 "사람들을 잡아가면 노동력이나 군사력으로 쓸 수 있고, 이 사람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내거나 할 때 몸값을 챙길 수 있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포로가 굉장히 중요했던 것"이라고 전했다.

"청태종이 나서서 '포로는 그냥 얻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장에 나가 목숨 걸고 얻어낸 성과이니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으니까요. 결국 사람을 전쟁으로 얻어낸 재물로 취급한 셈입니다."

그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 문제가 이후 조선의 정치·사회·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진단했다.

이에 대해 한 교수는 "잡혀간 가족을 데려오려면 몸값을 치러야 했다. 대개 은을 지불했는데, 나중에는 담배 등을 주기도 했다"며 "이 과정에서 조선 사회의 양극화가 심화된다. 몸값이 올라가더라도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가족을 쉽게 데려올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왕 자리에 있던 인조를 평가해 달라'는 요청에 그는 "인조가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할 때는 '광해군 정권에 문제가 많았으니 광해군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정치를 해보겠다'는 의지가 넘쳤다고 볼 수 있다"며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청에게 항복했던 인조 정권의 잘못된 출발은 이미 '이괄의 난' 때 싹수가 확실하게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하> '국가' 내팽개친 '정권' 안보, 나라꼴을 우습게 만들다]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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