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에 대한 검찰 항소에 개입했을 뿐 아니라 1심 선고 결과도 미리 알았다는 정황이 나왔다.
박영수 특별검사팀도 이같은 정황들이 김 전 실장의 직권남용 혐의를 입증할 증거에 해당하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CBS노컷뉴스가 입수한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업무일지)을 보면, 김 전 실장의 지시사항을 뜻하는 '장' 아래에는 원 전 원장을 뜻하는 '元-2.6y, 4유, 停3', '이종명-민병주-1y, 2유, 정1년'라고 적혀있다.
날짜는 2014년 9월 11일, 원 전 원장의 1심 선고가 있던 날이다.
당시 선고를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이범균)는 비망록에 나온 것과 똑같이 원 전 원장에게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같은 혐의의 이종명 전 국정원 차장과 민병주 전 심리전 단장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
박근혜 대통령이나 김 실장이 주재한 비서관 회의가 통상 아침에 열린다는 점에서 김 전 실장이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1심 결과를 미리 알았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원 전 원장의 1심 결심 공판은 같은 날 오후 2시에 열렸기 때문이다.
비망록에는 같은해 6월 25일 아침 회의에서 김 전 실장이 "매일 아침 회의를 계속한다"는 지침을 내린 것으로 기록돼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원 전 원장의 형량 아래에는 '선거개입 말 것, 2012. 1월 대선후보자 윤곽도 不명(불명) 오히려 2010. 10 이후 감소, 선거시기 이전부터 쟁점//선거운동의 목적성, 계획성 無(무)'라고 적혔다.
이는 국정원이 정치적 목적을 지닌 댓글을 조직적으로 달았을 때는 대선후보자 윤곽도 나오지 않아 대선 개입과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재판부는 국정원의 ‘정치관여 행위’가 있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행위’가 대통령 선거운동에 해당하지는 않는다고 판단해 법조계 안팎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2012년 1월 국정원의 사이버 활동이 시작된 시점에서 대선까지 11개월이나 남아 당선 혹은 낙선운동의 대상이 될 여·야의 대선후보가 불분명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선거법 위반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1심 선고 다음날인 9월 12일 '元-사필귀정. 특정인 낙선, 당선 지시=상식; 채, 윤 등'이라고 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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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비망록에는 '공소장 변경, 상식 납득 안되는 기소, 공소유지 난리→ 무죄. 검찰 책임 물어야. 判決文(판결문) 증거 검토, 항소여부 決定(결정), 야당 비난 - 지도' 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채'는 당시 채동욱 검찰총장, 특별수사팀장이었던 윤석렬 검사(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특검 수사팀장)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정권의 압박에도 공직선거법을 적용해 기소했고, 조직에서 쫓겨났거나 한직으로 좌천됐다.
'(판결문) 증거 검토, 항소여부 決定(결정)'이라는 대목은 김 전 실장이 1심 결과에 대한 항소 과정에 개입했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될 수 있다.
김 전 실장은 앞서 항소여부를 결정하는 공소심위워원회에 기소 검사를 배제하도록 가이드라인을 내린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CBS노컷뉴스 2017년 1월 1일자 김기춘, '국정원 댓글 사건' 항소 무마 시도 기사 참고]
공교롭게도 원 전 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무죄로 판단한 이범균 부장판사는 지난해 2월 인사에서 대구고법 부장판사로 승진했다.
앞서 원 전 원장의 1심 판결을 '지록위마' 판결이라고 비판하는 글을 법원 내부망에 올렸다가 정직 처분을 받은 김동진 부장판사의 징계 과정에 김 전 실장이 개입한 정황,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 결정 과정에도 개입한 정황 등도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