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직무중지 중인 박근혜 대통령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탄핵소추로 직무정지 상태인 박근혜 대통령이 새해 첫날 자신에 대한 모든 혐의와 의혹들을 전면 부인하고 나선 것은 세 번에 걸친 대국민 담화에 대한 '셀프 부정'일 뿐만 아니라 1천만 촛불민심을 정면으로 거스른 처사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특히 탄핵소추 기간중 대통령 직무정지를 규정한 헌법을 또 한 번 위반한 행위라는 지적이 나오는 등 느닷없는 기자간담회에 대한 후폭풍이 거세지고 있다.
◇ 의혹·혐의 전면 부인… 새로운 내용 없어박 대통령의 1일 오후 기자간담회는 충분한 사전 예고 없이 열렸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세월호 7시간 행적', '국민연금의 삼성합병 지원 의혹', "최순실 지인회사 현대차 납품의혹' 등 탄핵심판의 핵심 쟁점은 물론 비선진료, 미용시술 등 국민적 관심사가 높은 사안에 대해 입장을 밝혔다.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 전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청와대 홈페이지에 '오보·괴담 바로잡기'를 올렸음에도 왜곡·오보·허위가 남발돼 탄핵소추까지 당한 상황에서 새해를 맞아 그동안 못했던 말을 쏟아 낸 것이다. 하지만 이날 박 대통령의 발언에 새로운 것은 없었다. 제기됐던 의혹·탄핵소추 사유에 대한 전면 부인이었다.
일부 부분에서는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인상도 풍겼다. 세월호 7시간 행적과 관련해 오후 5시가 넘어서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한 데 대해 "경호하는 데 필수 시간이 필요하다"고 경호문제로 돌렸다. 또 "그 쪽(중대본)도 무슨 상황이 생겨서 확 떠나지를 못했다"고 책임의 일부는 중대본에 떠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긴박한 상황에서올림머리를 위해 외부에서 미용사를 부른 데 대해서는 따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검찰이 최순실씨를 기소하면서 밝힌 부분에 대해서도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최 씨 지인이 운영하는 부품업체가 현대차에 납품하도록 한 부분에 대해서는 "실력이 있다고 하면 한 번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좋지 않겠냐는 차원이었다"고 말했다.
차은택 씨가 인사 추천을 한 데 대해서도 "누구나 추천을 할 수 있다"며 무엇이 문제냐는 반응을 보였다. 국민연금의 삼성합병 의혹에 대해서는 당시 분위기상 합병을 해줘야 한다는 분위기였다면서 대통령으로서 국민연금이 잘 대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 뿐 도와주라고 지시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김영재 원장 등이 '보안손님'으로 청와대를 드나든 것과 관련해 각종 시술, 주사 의혹이 이는 데 대해서는 '사적영역'에 속한다며 "어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잘못된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순방 때 피로를 회복할 수 있는 영양 주사도 놔 줄 수 있는 거다'. '영양 주사를 놓을 때 그 안에 뭐가 들어가는 지 환자가 어떻게 알겠느냐'며 억울함도 호소했다.
◇ 세 차례 대국민 담화 부인… 민심과도 동떨어져
지난해 11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이 제3차 대국민 담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게이트의 발단이 된 태블릿 PC가 발견된 이후 세 차례에 걸쳐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1차는 지난해 10월 25일에 2분, 2차는 11월 4일에 9분, 3차는 13분 가량의 분량이었다.
박 대통령은 1차 담화 때는 대통령 연설 문건 등이 유출된 사실을 인정하면서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치고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 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2차 담화 때도 "이 모든 사태는 모두 저의 잘못이고, 저의 불찰로 일어난 일"이라고 책임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라고 울먹여 전 국민적 유행어의 진원지가 되기도 했다.
3차때는 담화의 어조가 다소 강경해졌다. "제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며 승부수를 띄우기도 했지만 결국 "저의 불찰로 국민 여러분께 큰 심려를 끼쳐드린 점 다시 한 번 깊이 사죄드린다"고 거듭 대국민 사과를 내놨다.
그러나 탄핵소추를 당한 23일 동안 본래의 전투력을 회복한 탓인지 신년 기자간담회에서는 '사과'나 '죄송하다'는 발언은 나오지 않았다. 청와대를 출입해 식구 같이 생각하는 기자들에게 미안하고 국민들에게 계속 미안하다고는 했지만 세 차례의 대국민 담화때와 같은 진정성은 느껴지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깜짝 기자회견이 다시 전열을 정비하는 모양새인 보수층을 결집시키는 효과를 발휘할 수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탄핵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일각에서는 본격적인 탄핵심리를 앞두고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해명 없이 부인으로 일관해 득보다는 실이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새누리당을 탈당해 만든 개혁보수신당의 장제원 대변인은 간담회 직후 시기와 형식·내용 면에서 모두 부적절했다면서 "대통령께서 국정농단 사태에 대해서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게 된 계기가 됐다"고 비판했다.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한상희 교수는 "박 대통령 대리인이 하는 답변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메시지도 없고, 자기방어의 구체적 내용도 없어서 참조할 게 없는데 그걸 왜 보도하는지 모르겠다"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박 대통령이 자기 기준에서 얘기하는 걸 보니까 아직도 국민들의 생각이 뭔지 판단을 못하는 것 같다"고 일침을 가했다.
◇ 직무정지된 대통령이 기자간담회?…헌법 위반 새로운 쟁점으로헌법 65조 3항은 "탄핵소추의 의결을 받은 자는 탄핵심판이 있을때까지 그 권한행사가 정지된다"고 규정돼 있다. 이같은 명백한 규정에도 불규하고 직무가 정지된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출입기자와 간담회를 통해 최대 현안에 대한 입장을 밝히자 헌법 위반 논란이 일고 있다.
한상희 교수는 "청와대 직원이 통제하고, 전속 사진사가 사진을 제공하는 간담회는 자연인 박근혜의 행위라고 볼 수 없다"며 기자간담회가 법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 중견 법조인도 "정부시설에서 정부 비용으로 신년 간담회를 한다는 자체는 공적인 직무범위이기 때문에 박 대통령의 행위는 직무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임지봉 교수도 "헌법 65조 3항에 따르면 기자들이 아무리 찾아와서 말을 해 달라고 요구를 해도 간담회에 응해서는 안 된다"며 "대통령으로서 간담회에 응하는 것은 대통령 권한행사이기 때문에 위헌사유가 하나 더 추가되는 셈이다"고 적극적인 헌법 위반론을 폈다.
다만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 출신의 한 법학자는 "기자간담회가 대통령으로서의 권한 행사인지, 사인으로서의 행위인지 애매하다"는 신중론을 폈다. 그렇지만 이 학자도 "왜 기자간담회를 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탄핵심판이 진행되는 동안 어떻게 지냈을까? 노무현재단 오상호 사무처장은 "당시 노 대통령은 탄핵소추 의결이 있은 직후 현안에 대해 특별한 언급없이 관저에서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지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자들과 청와대 뒷산(북악산 시민 개방 부분)을 올랐었지만 문제될 발언은 없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