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에 이어 중동을 강타한 대장금, 베니스에서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최근 전 세계인의 이목을 단번에 휘어잡아 버린 싸이의 강남스타일. 전문가들은 이같은 한류 열풍의 뒤에는 '한글'이라는 우수한 문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 정작 대한민국에서의 한글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CBS는 한글날을 맞아 날로 심화되고 있는 우리 일상속의 '한글 파괴 현상'을 짚어보기로 했다. 9일은 새터민들이 남한 사회에 와서 겪는 시행착오의 상당부분이 이질적으로 변해버린 우리말 때문이라는 웃지 못할 사연을 보도한다. [편집자 주] "자, 한번 큰 소리로 읽어볼까요? 뉴스페이퍼(newspaper), 남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도 많이 쓰는 단어인데 앞으로는 '신문'이라고 이해하세요."
서울 서대문구의 한 강의실. 이곳에 모여 영어를 공부하는 10여명의 사람들은 모두 북한을 탈출해 대한민국으로 온 새터민들이다.
대부분 남한에 온지 5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남한말'이 어색하다. 새터민 김숙자(가명)씨는 "처음 왔을 때 같은 남한말 북한말이 이렇게 다를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마치 외국에 온 것 같았다"고 말했다.
새터민들이 어려움을 겪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말에 영어를 섞어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단 영어부터 배워야 하는 탈북자들의 모습은 남북 언어 차이가 얼마나 큰 지를 방증한다.
김씨는 "처음 화장품 가게에 갔는데 아무것도 못 고르겠더라고. 무슨 미국말을 그렇게 많이 섞어 쓰는지... 우리는 '미용사'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헤어디자이너'라고 하고. 누가 '스트레스 받는다'고 해서 나는 그게 자동차 이름인 줄 알았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문화적 차이로 남한에서만 사용되는 단어도 새터민들에게는 큰 장애물이다.
새터민 영어강의
새터민 한정근(가명)씨는 "북한에서 그냥 쓰는 '건물'도 '빌라', '아파트', '다세대주택' 등으로 굉장히 세분화되어 있어서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고 설명했다.
남한말을 열심히 배우며 우리말 겨루기 방송 출연 오디션에도 참가했었다는 새터민 김영아(가명)씨도 "문제에 '밥바라기'라는 말이 나왔어요. 먹는 밥에 연관된 것인지 한참을 생각했죠. 나중에 알고보니 '금성'의 우리말이라는거에요. 북한에서는 단 한번도 들어본 적 없어요"라며 어려움을 털어놨다.
한글이라는 문자를 함께 사용하는 남북이지만, 이렇듯 언어가 상당 부분 달라져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종종 생긴다.
한 새터민은 강아지 사료 통조림에 한글로 표기된 '퍼피(puppy, 강아지)'를 이해하지 못해 겪을 수 밖에 없었던 '황당한' 경험을 얘기했다.
"마트에 가보니까 개가 그려진 통조림이 있어서 단고기(개고기) 생각이 나서 몇개 사와서 먹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개 사료였다"며 "영어를 그렇게 써놓으면 우리같은 사람이 어떻게 아느냐"고 말했다.
또다른 새터민 김화자(가명)씨도 "북한은 동물은 '대가리', 사람은 '머리', 이렇게 구분이 확실한데 처음 남쪽으로 왔을 때 '소머리국밥'이란 말이 어찌나 이상하게 들리던지 한참을 웃었다"고 거들었다.
전문가들은 남한과 북한의 언어 차이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한다.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한용운 편집실장은 "어휘에 의한 차이가 굉장히 많다. 낱말에서는 거의 30% 이상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말이 사회상을 반영하는데 서로 다른 말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불신과 위화감이 조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 '늙은이'란 말은 전혀 부정적인 어감을 갖고 있지 않지만 남한에서는 '노인'을 비하하는 말이라 충돌이 생길 수 있다는 것.
한 실장은 이어 "남한은 무분별한 외국어 사용을 삼가고 북한은 국가 정책적으로 너무 인위적으로 낱말을 바꾸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결국 남북이 서로 교류의 폭을 넓히는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사회·정치적인 이유로 '교류'가 어렵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60여년 지속된 분단의 폐해를 인식하고 이제라도 남북간 언어의 차이를 좁히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