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자
"이방자 여사는 우리 장애인을 밝은 세상으로 이끌어 준 등불이었습니다"
12일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가 세운 국내 최초의 장애인 직업교육시설 ''명휘원''을 찾은 2기 졸업생 김명숙(57.여.지체장애3급) 씨는 "장애인 졸업생들이 사회에 진출해 자리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던 여사의 열정적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1969년 명휘원 수예반을 졸업한 뒤 이방자 여사를 도와 명휘원에서 8년간 장애인들을 가르치다 현재 경기도 광명시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으며 명휘원 1기 졸업생인 남편과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김 씨는 "당시 장애인들은 학교나 직장을 가지는 것은 꿈도 못 꿨고, 집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어려워했다"며 "여사님은 그런 우리들을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이끌어준 사람"라고 회상했다.
''장애인들이 기술 등 직업적 전문성을 갖추고 사회에 안착할 때까지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여사는 장애인들이 만든 옷을 입고 장애인이 만든 제품을 판매하는 바자회 등을 열게 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이러한 사회화 과정을 거쳐 장애인들은 사회 진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수익금으로 기숙사 설립과 학생 증원 등 복지사업도 확대할 수 있었다.
또 국내에는 장애인을 위한 재활 지원이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여사는 고국인 일본 등 해외를 다니며 지원을 받아오기도 했다.
김 씨는 "많은 장애인들이 그때 배운 기술로 30년이 넘도록 당당한 사회구성원으로 살고 있다"며 "여사님은 항상 큰언니 같이 편안하게 장애인들을 대했고 우리가 직접 만든 한복을 아이같이 기뻐하며 즐겨입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 씨는 그러나 "일본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여사의 이러한 업적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일본 왕족 신분으로 일본에 볼모로 끌려갔던 영친왕(이은)과 정략결혼한 이방자 여사는 해방 후에도 정치적인 문제로 영친왕이 국내로 돌아오지 못하면서 어려움을 겪었으며 장남 이진이 1922년 생후 9개월만에 국내에서 의문의 독살을 당하는 아픔을 겼기도 했다.
김 씨는 "생전 여사의 전속사진사로 활동했던 김만식 씨가 매년 여사의 추모전시회를 가졌지만 김 씨가 사망하면서 그마저 끊겨 아쉽다"며 "다른 졸업생들과 함께 기념사업을 펼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방자 여사는 1963년 영친왕과 함께 한국으로 온 뒤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쳤다.
특히 남편인 영친왕과 함께 장애인 복지에 대해 관심이 많아 1963년 신체장애자재활협의회 부회장을 시작으로 1966년 장애인 재활을 위한 자행회, 1967년 직업교육전문기관 명휘원을 잇따라 설립했다.
남편의 호인 명휘(明暉)를 따 명휘원이라 이름짓고 남편과 자신의 호인 가혜(佳惠)에서 한자씩 따 명혜학교를 설립할 만큼 생전 남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지극했다.
또 일본 왕족의 신분임에도 한국에 돌아온 뒤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나는 한국인이고 내가 묻힐 곳도 한국입니다"라고 밝혔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도 두터웠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기도 했던 이방자 여사는 1985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에 명휘원 운영을 맡긴 뒤 1989년 숨을 거뒀으며 같은해 장애인 복지활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